Rayuela : 팔방치기
-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vasistas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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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의 처음이 무엇이었느냐면, 우선 피를 뽑고, 심적으로 뚜드려 맞고, 바보 같은 파랑색 여권이 가방 주머니에 잘 있나 확인하고, 호텔 열쇠가 선반 못에 얌전히 걸려있는지를 느껴야만 했다. 두려움, 무지, 찬란한 눈부심. 여기는 그렇게 이름 불리고 또 그에 걸맞기가 요구된다. 도시가 곧 내게 미소를 지을 테고, 이 길을 지나 식물원Jardin des Plantes이 시작된다. 파리, 더러운 거울 옆 클레의 그림이 담긴 엽서. 어느 오후 마가는 세르슈-미디 길에 등장하였고, 이후 통브-이수아르 길가 내 집에 오를 때면 언제나 꽃 한 송이를, 클레나 미로의 엽서를, 그리고 돈이 없을 경우에는 공원에서 플라타너스 나뭇잎 한 장 정성스레 주워 왔다. 당시 나는 새벽 거리에서 철사나 빈 상자를 모았는데, 그것들로 흔들개비라든지 난로 위를 빙빙 도는 장식을, 또는 마가가 색칠을 도와준 무용한 기구들을 만들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다만 비판적이고 집착 없는 기예로 사랑을 행하였으며, 하지만 그럼에도 끔찍한 침묵에 잠기는 동안 맥주잔 속 거품은 미적지근 무슨 뱃밥 모양 쪼그라들었으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바로 이런 게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가가 몸을 일으켜 의미 없이 방 안을 돌아다닌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감탄을 한다든지, 무슨 사이렌 동상마냥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서 부드러운 눈길로 제 몸을 어루만졌는데, 그런 그녀를 보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나는 끝내 저항하다 못해 그녀를 옆으로 불렀고, 그러면 그녀는 조금씩 내 위로 포개어지더니, 제 육체의 영원성을 마주하고서는, 잠시 그토록 하나 되고 그토록 사랑에 빠졌다가, 그러고는 다시 둘로 나뉘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가급적 로카마두르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쾌락이란 이기적인 것으로 그것은 신음과 함께 좁은 이마로 우리를 들이박고, 소금기 가득한 손으로 우리를 붙들었다. 나는 마가의 무질서가 매 순간 발생하는 자연적 조건이라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는 로카마두르를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데운 면발로 옮겨 갔다가, 와인과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뒤섞었으며, 한달음에 내려가 길 모퉁이 할머니가 굴을 두 접시 까주기를 기다리다, 노게 부인의 조율 안 된 피아노로 슈베르트의 선율이나 바흐의 전주곡을 연주하고,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를 참아가면서 소고기 스테이크와 절인 오이를 곁들였다. 우리 생활의 무질서는 다시 말해 화장실의 비데가 자연적이고 완만한 힘에 의해 디스코텍이라든지 답장을 기다리는 파일로 변하는 식의 질서로, 마가에게 실토하기는 싫었으나 그것이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규율로 보였다. 나는 얼마 안 있어 마가에게는 방법론적 용어로 현실을 제기할 필요가 없음을, 무질서를 찬양하기란 그녀에게 있어 무질서를 성토하는 것만큼이나 분란을 일으키는 일임을 알았다. 그녀에게 무질서란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그녀가 들고 다니던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레오뮈르 길에 위치한 카페에서, 비가 내리고 우리가 서로를 갈망하기 시작했을 때) 그 사실을 알아챘고, 그런 다음에는 오히려 그를 받아들이고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내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대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바, 그렇게 수차례 며칠이고 정리도 안 해 헝클어진 침대에 누워, 지하철 꼬마아이 탓에 로카마두르 생각이 났다며 눈물 흘리는 마가를 본다던지, 알리에노르 다키텐 여공의 초상화를 보고 나서 머리를 빗거나 여공과 닮고 싶어 죽으려는 모습을 바라보면, 문득 내 삶에 이런 것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피곤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음이었다는 생각에 정신적 트림을 해댔는데, 이는 바로 나 자신이 순수한 변증법적 운동에, 올바른 처신을 대신하여 그릇된 처신에, 부화뇌동하는 정숙함보다는 변변찮은 부정에 머물렀기 그랬으리라. 마가는 머리를 빗고, 머리를 헝클고, 다시 머리를 빗었다. 로카마두르를 생각했고, 후고 볼프의 노래를 몇 곡 (조악하게) 불렀으며, 내게 입을 맞추면서 자기 헤어스타일이 어떤지를 묻고 노란 종이에 그림을 그렸는데, 이 모든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였으며, 반면에 나는 구태여 더러운 침대에 누워 구태여 미지근한 맥주를 마셨으니 이것이 언제나 나이자 나의 삶이었으며, 또 타인들의 삶과 마주한 나의 삶을 동반하는 나였던 셈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내가 이렇게 의식 있는 쭉정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이나 자랑스러웠고, 뜨고 지는 달들과 달들 아래, 마가와 로날드와 로카마두르와 클럽과 거리와 내 도덕적 질병들과 그 밖의 고름들과 베르트 트레파와 가끔의 허기와 나를 곤궁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트루이 할아버지가 만들어내는 셀 수 없는 이변들 가운데, 온갖 종류의 음악과 담배와 같잖은 비열함과 거래들이 쏟아지는 수많은 밤 아래, 그저 이 모든 것들의 위나 아래에서, 도무지 나로서는, 그러니까 최소한의 정숙함만 있다면 (정숙함이라니!) 더럽혀진 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또는 통상의 보헤미안들 행세를 하고 싶지가 않았는데, 왜 그런가 하냐면 이런 주머니만한 크기의 혼돈이란 정신의 상위 질서이거나 부패이기 매한가지인 임의의 징표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가를 만났고, 본인도 몰랐지만 그녀는 나의 목격자이자 첩자였기에 나는 이 모든 생각에 언제나 거북해 하였고, 또 존재보다는 사유가 내게는 훨씬 더 쉬운 일이며, 짤막한 문장의 에르고ergo가 그닥 에르고나 그와 유사한 무엇도 아니라는 데 짜증이 났는데, 그렇게 우리는 함께 좌안을 걸었고, 마가는 자신이 나의 첩자며 목격자임을 모르는 채로, 내가 엄청나게 다양한 것을, 문학에 정통하였을뿐더러 cool 재즈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봤을 땐 엄청 신비한 것들을 알고 있다며 감탄을 해댔다. 나는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일종의 길항작용으로 그녀와 가까워짐을 느꼈고, 우리는 쇠와 자석의, 수비와 공격의, 벽과 공의 변증법으로 서로를 좋아했다. 짐작하기로 그녀는 내게 환상을 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내가 뭇 편견들로부터 치료된 자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편견들에, 좀 더 가볍고 좀 더 시적인 편견들에 가닿는 중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나는 불안한 만족과 거짓 휴전의 한복판에서, 팔을 뻗어 파리라는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스스로를 둘둘 휘감는 무한의 재료를, 창문에 비치는 다락방과 구름과 대기의 마그마를 만져보았다. 바야흐로 무질서는 없으며, 바야흐로 세상은 무언가 단단한 돌이 되어 쌓여만 갔으며, 경첩을 중심으로 돌도 도는 놀이장치로, 거리와 나무와 이름과 나날이 뒤섞인 타래로 변해갔다. 그곳에는 탈출구가 되어줄 무질서가 존재치 않으며, 그저 불결과 비참이, 맥주 찌꺼기가 남은 컵들과 구석에 웅크린 양말이, 머리카락과 섹스를 풍기는 침대만이, 그리고 투명하고도 얇은 손을 뻗어 내 근육을 더듬고 공허 가득한 각성상태로부터 잠시나마 나를 벗어나게 할 애무로 애태우는 한 여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너무도 늦어 버린 게, 언제나 그렇하듯, 그토록 많은 사랑을 나누었음에도 정작 행복은 다른 것이어야 했기에, 이곳에서의 행복과 쾌락보다는 더욱 슬픈 무엇이어야만, 섬과 같은 분위기이거나 일각수여야만, 부동 속 끊임없는 추락이어야만 했다. 마가는 알지 못했다, 나의 입맞춤이 그녀 너머로 열리는 두 눈과도 같은 것임을, 내가 이탈한 자 되어 나아가고 세상의 다른 형상으로 화하고 있음을, 어지러움에 비틀거리는 항해사로 검은 뱃머리에서 물과 시간을 가르며 항해함을.
이 50년대의 나날에 나는, 무언과 발생했을 법한 개념과 마가 사이에 감금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가의 세계와 로카마두르의 세계에 반기를 들기란 어리석은 짓으로, 혹여 독립을 한들 그 즉시 더는 자유롭다라고 느끼지 못하게 될 거라고, 온 세상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나는 누구와도 비교가 불가능한 위선자로서 내 살갗과 다리가 감시당하는 일에, 내가 마가를 누리는 방식은 물론이고 목책 너머 키에르케고르를 읽으려는 울타리 속 앵무새로서의 나의 시도들이 정탐 당하고 있음에 곤혹스러웠는데, 특히나 마가 자신이 내 목격자라는 의식이 없을 뿐 아니라, 반대로 나를 유아독존의 존재로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성가신 일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이 아니다. 정말 화가 나는 건, 결국 내가 마가의 세계에 감금되었다 느끼는 요 며칠만큼이나 자유에 근접하기란 앞으로 불가능할 것이며, 해방에 골몰하려는 행위 자체가 기실 패배를 인정하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반합의 구타들로는, 마니교적 스크린샷이나 멍청하고도 성마른 이분법으로는, 마가가 나를 끌고서 로카마두르를 보러 가던 몽파르나스 역 계단들로 걸음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어째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질서·무질서·자유 따위의 개념들을 세운다던지 설명을 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으며, 로카마두를 그냥 코차밤바 길 안뜰에서 제라늄 화분을 나눠주는 사람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아마도 올리브 정원이나 똥통의 문고리를 찾기 위해 더욱 더 어리석음에 빠져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 순간 나를 놀래킨 건, 바로 마가가 자기 아들을 로카마두르라고 부르는 지점까지 자신의 판타지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구사회에서 논리를 찾아내는 데 진력이 났던 반면, 마가는 그저 아들 이름이 아버지와 똑같으며, 이제 아버지가 없으니 아이를 로카마두르라 부르는 것이며, 아이를 키우기에는 시골로 보내 유모en nourrice를 붙이는 게 낫다라는 말만을 할 뿐이었다. 로카마두르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않고 몇 주고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시기는 언제나 그녀가 리더lieder 가수가 되고자 할 때와 일치하였다. 그러면 우리를 방문한 카우보이cowboy 같은 붉은 색 머리로 피아노 앞에 앉았으며, 마가는 목청껏 휴고 올프의 노래를 불렀으니, 그럴 때마다 이웃방에서는, 플라스틱 구슬을 꿰매던 노게 부인이, 세바스토폴 대로에 내다 팔려던 그녀의 몸이 그 우악스러운 목소리에 벌벌 떨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가가 슈만을 부를 때를 좋아했는데, 그러나 모든 건 그날 저녁에 달의 상태나 우리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아니면 로카마두르가 어떠한지에 달렸으므로, 어쩌다 마가가 로카마두를 떠올리게 되면 노래는 바로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러면 로날도가 홀로 피아노에 앉아,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비밥bebop에 관한 생각을 다듬거나 감미로운 블루스blues로 우리 모두를 끝장내 버렸다.
나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로카마두르에 관해서는 쓰고 싶지가 않은데, 아마도 나를 중심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모든 것들을 떨쳐내고, 좀 더 나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일이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언제나 내가 뭔 말을 하든 중심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없이 운을 떼곤 하는데, 결국 우리 서양인들의 삶을 질서정연해 보이게끔 하는 기하학 함정에 빠져서는 축이라든지 중심, 존재 이유raison d’être, 옴파로스Omphlos, 인도유럽적 동경 어린 이름들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내가 그토록 묘사해 보려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이 마른 나뭇잎처럼 나부끼는 파리마저도,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두려움과 자루 달린 만남이 배후에서 박동치지 않는 한, 그것들이 우리에게 드러나기란 요원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단어들이, 얼마나 많은 명명들이 조화롭지 못한 하나의 혼란을 위하는가. 나는 때때로 어리석음이란 곧 삼각형을 이름하며, 팔 곱하기 팔은 개새끼이거나 광기임을 납득하다. 마가에게 안긴 채 나는 생각한다, 이처럼 성운을 구체화 시키거나 빵 속으로 인형을 만드는 일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그것은 결코 쓰여지지 않을 소설을 쓴다거나 인민을 구할 이념들을 목숨 받쳐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시계 속 진자가 매 순간 오고감을 완료하고 다시 나를 안정된 범주들 속으로, 의미 없는 인형과 초월적 소설과 영웅적 죽음으로 편입시킨다. 그것들을 나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줄 세운다. 인형, 소설, 영웅주의. 나는 오르테가와 셸러가 그토록 훌륭하게 탐구해 낸 가치들의 위계를 생각해 본다. 미학적인 것, 윤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종교적인 것, 미학적인 것, 윤리적인 것. 윤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미학적인 것. 인형, 소설. 죽음, 인형. 마가의 혀가 나를 간지럽힌다. 로카마두르, 미학, 인형, 마가. 혀, 간지럼, 미학.
(-11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