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15일부터 매주 금요일 20시에 5회 간 「작가와 작가 읽기」라는 이름으로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제가 오래 읽고 작업한 작가들의 작품을 그와 상응하는 한국 작가의 작품과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저는 평소 문학을 제 작업 외에 딱히 에세이나 공개 장소에서 나불거리며 소모하지 않기에, 저의 문학이 다른 사람들의 문학과 어떻게 다른 지도 조금은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제 인스타를 확인 바랍니다: @traducteur_etudi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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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성웅입니다.

 

공사가 다망하여 그간 격조했습니다.

바쁜 와중에서도 ‹ 저편으로부터의 두 번째를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했는데, 어제 제가 어쩌다 보니 기획하여 시작된 부쟁고 야회에서 우노 쿠니이치 선생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제를 정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들뢰즈의 제자이자 질 들뢰즈 및 앙토냉 아르토 전공자로 유명한 선생님인데, 선생님 관련 잡담은 인스타 피드백을 확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노 쿠니이치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시인 요시오카 미노루와 암흑무도의 창시자 히지카타 타츠미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둘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다른 두 명의 작가를 거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 작가 장 주네(1910-1986)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미시마 유키오(1925-1970)입니다.

 

장 주네

기존의 장르와 권위 속에서 비롯하는 대부분의 시시한 문학 혹은 문학인과 달리, 장 주네는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창부였던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10세 때는 굶주린 배를 억제하지 못하고, 애정에 굶주려 절도죄로 감화원에 들어갑니다. 그 후 주네는 탈옥하여 거지, 도둑, 남창, 죄수로 생활을 하며 유럽 전역을 방황합니다. 1942년 독일 점령기에 투옥되었을 때에는 그의 나이 서른두 살로, 그때 그는 처녀작 《꽃의 노트르담》과 자서전 성격이 강한 《도둑일기》를 썼습니다.(《장미의 기적》은 이로부터 2년 뒤 세상에 나옵니다.)

 

이러한 장 주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일본의 작가가 있었으니,바로 미시마 유키오입니다. 장 주네와 달리 왕족과 귀족 도련님들이 다니던, (사족이긴 하지만 제가 석사 학위를 받은 곳이기도 한) 가쿠슈인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되레 장 주네에게 더욱 끌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초가 되기 전 유약한 미시마

미시마 유키오는 장 주네의 《도둑일기》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평을 쓰기도 했습니다 :

“(주네는) 경력만으로도 굉장하지만, 괴물 작가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 만이 아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남색·도둑질·배신의 세계를 그리면서 그것을 거룩한 높이에 올리려고 했다. ,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장 주네에 대한 독서 편력은 미시마 유키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적어도 자기 개조 이후 금각사를 쓰기 전까지, 나약한 다자이 오사무가 죽은 다음 그는 못 생겼으니 기계체조와 냉수마찰이나 했으면 좋았다는 신랄한 글을 쓰기 전까지, 그러니까 동성애가 주제로 나오는 《가면의 고백》과 《금색》에 이르기까지는 주된 참고 작가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장 주네와 미시마 유키오의 영향 아래에서 한 명의 무도가와 한 명의 시인이 탄생합니다. 서양의 전위前衛를 답습하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하는, 서구와 비서구의 위치를 뒤집어 엎는 전위顚位로서의 예술, 전위로서의 문학을 탄생킵니다. 다름 아닌 히지카타 타츠미(1928-1986)와 요시오카 미노루(1919-1990)가 말이지요.

히지카타 타츠미에 대해서는 전공자이자 유일하게 한국어로도 작업한 이재인 님의 논문에서 몇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이재인 님의 두 편의 논문도 첨부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보면 좋겠습니다. :

 

히지카타 타츠미는 독일의 현대 무용을 전공한 에구치 타카야의 제자인, 마쓰무라 카츠코가 아키타시에 연 현대무용 연구소에서 독일계 현대무용을 배우는 것으로 무용을 시작하였다.”

 

이후 (...) 1959, 드디어 암 흑부토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킨지키(禁色)>를 발표하게 되었다. <킨지키> 는 미시마 유키오의 동명 소설 《금색》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된 작품으로서, 동성애의 테마나 , 남색적인 움직임, 암전을 사용한 조명 등 무대 위의 모든 연출이 당시의 일본의 현대무용계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었으며, 매우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일본 무용계로부터 보기에 무용으로서 인정하기 어려운 무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엄격한 일본의 무용계로부터는 혹평을 받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당시의 일본의 전위 미술가나 미술 평론가들, 문학가들로부터는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성공했다. 히지카타의 작품에 주목하였던 당시의 저명한 문학가들 중 한 명이, 부토 작품 <킨지키>의 모티프가 되었던 소설 《금색》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였다. 미시마는 히지카타의 부토 작품 <킨지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의 글을 남겼다.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육체의 돌연의 움직임, 돌연의 고함 같은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기대에 거의 응답하지 않고, 우리들의 목적의식에 끊임없이 정묘하게 외면하기 때문이다. (...) 춤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그 시간적 계속을 보증하는 것이, 음악이 아니라, 단지 몇 개의, 반 자각적이고 반 몽환적인 땀에 젖은 육체라고 하는 것은, 무용이라고 하는 것이, 육체에 대해 부과하고 있는 순수성의 의미 그 자체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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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히지카타 타츠미에 빠지게 된 것은 이재인 님의 논문 때문도, 우노 쿠니이치 선생님의 저서 《히지카타 타츠미 쇠약체의 사상》 때문도, 미시마 유키오 때문도 아닌 한 시인으로부터였습니다.

 

저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일본어로 일본현대시를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혹시 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일본어로 참여하고 싶으신 분은 따로 연락주셔도 좋습니다.)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을 멋대로 끌어들여 진행하는 모임이라 동경대의 학생부터 선생까지 주로 모이고, 그 외에도 중국인 유학생과 한국인 친구들도 참여해 적당히 한중일 3국의 평화(?)를 도모하고 있는 모임입니다.

 

일본에 온 지 3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현대시를 읽어나가고 있는데, 학교 수업에서는 근대시까지만 다루기에, 현대시를 읽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너무 부담이 되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참가하기가 힘들기에, 일주일에 한 번, 한 시인의 작품 2-3편 정도만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매번 돌아가며 누군가 한 명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작품을 선정해야 하고, 그 사람의 안목을 바탕으로 문학전공자들이 토론을 하기에, 나름의 쫄깃함도 있고 재밌는 시간입니다.

 

이 모임에서 몇 주 전에 알프레드 자리 연구자인 사와라 상이 고른 작품이 바로 요시오카 미노루의 시였습니다. 평소에도 진지 그 자체인 사람이고, 시평론으로도 상을 받았던 사람이기에, 어떤 시를 가져올까 궁금했는데, 놀랄 정도로 묵직한 다음 두 편의 시를 가져왔습니다. (다 보여주긴 좀 길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여, 한 편만 소개후 다른 한 편은 다른 곳에서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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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안마 어휘편

요시오카 미노루 지음, 최성웅 옮김

 

1

나는 보았다!

어스름한 남동 방향을 목표하여

한 노파가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의 끝

그 높이까지

수면은 솟아오른다

그 수면이 이윽고 수평이 됐을 때면

옛 마을잔치 같은

그리운 느낌이 든다

수상한 냄새 뒤가 구림

구체성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금가루 흩날리고

우아한 목숨이 끊어질 듯한 일몰의

관념의 틀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관절의 평야로

언어로부터 부토로 그리고 풍경을 바꿔서

‘젖먹이 아이의 뺨에 가 닿는다

그물코로부터

나는 무엇을 들여다보면 좋은가

상인방上引枋의 먼지

잘록한 가지 꽁무니

낙지 빨판이 빨아낸 것

또는 추상화된 선

사랑’

기물과 한 패가 되기

를 끝마치고자

‘나는 침상에 만주를 끌어들인다’

 

2

옛부터

큰 톱이 있었으니

몽둥이에 감겨

있는 천이나 붉은 실 있었으니

불 붙은 어미의 반백발 좋아

풀솜으로 폭신하게 둘러쌓인 언니의 발 더듬어

‘위에 가면 정령 아래에 있는 것

이 인형’

그리고

어찌할 할 도리가 없는

‘한 패인 것이 육체’

이윽고 동틀 녘

‘밥 먹고 뒷문으로 빠져나오는 듯한 것이 혹은 도호쿠본선

그래서 메밀국수집의 열한 번째 막내는

사탕 말고

‘재래식 변기 앞대가리에 이빨을 들이민다’

밤은 단조롭기에 탐미적이다

생강을 갈듯

창문살 엮는 장인의 노랫소리 들린다

 

3

‘치조농루를 앓는 아빠가 엄마의 기저귀를

씻고 있는 강가에서 형이 돌을

들어올리면

공처럼 둥글게 변하는 곤충이 있다’

몸을 작게 만들기

‘사물의 울타리 속에서 몸의 길이를 잰다’

이것이 이른바 가仮매장

나무젓가락을 둘로 가르며

연옥부토의 그림을 생각한다

나는 물벌레 사람

강물에 떠내려가는 수박을

죽은 자와 함께 먹는다

한밤중 천연두 투성이의 인물은 누구인가?

김이 나온다

덧문짝에 몸이 얹힌 채

연어 머리를 갉아 먹는 남자가 보인다

염천 아래에서

오돌토돌한 오이가 자라난다

종교화 마냥

 

4

장화를 신은 채로

새신부는 돌아온다

절연애자와 눈의 세계로부터

뚝뚝 나를 낳기 위하여

벽장 안으로 들어간다

‘움직이지 않는 것과 움직이고 있는

것 반반’

나는 몸 성히 태어날 것인가?

‘성스러운 각도를 더듬는 자’

가 되려는

왜인지 무서운

애를 떼기 위한 약 끓는 소리다

마대를 뒤집어 쓴 말이 일어나고 일어나

혼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재단과 재의 바닥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형식이 아니던가

‘물고기의 부레를 철썩 짓이긴다’

할 정도로 자연 그 자체다

나의 꿈꾸는 연골에 필요한 것은

사물의 발정과 콜타르의 악취다

다시 살아난다는 유머도 곁들여

‘쇠뜨기를 씹는 노인의 턱을 빼면

불이 뿜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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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는 요시오카 미노루의 후기 시집 중 첫 시집으로 거론되는 《사프란 따기》(1976)에 등재된 작품입니다.

 

전기 시는 어둡고 조금은 불쾌한 풍경을, 오브제를 묘사하였고, 개중에 제가 한국에 소개했던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과 마찬가지로 H씨 상을 수상한 《승려》(1958)이 가장 널리 알려진 시집입니다.

 

저는 아직 《승려》를 꼼꼼히 읽어본 적이 없지만, 《사프란 따기》에 나온 시들은 제가 일본에서 읽은 모든 시들보다 매력적이었습니다.

 

모임에서 곧장 일본어로 읽으면서 토론하기는 힘들기에, 미리 번역을 해가는데, 요시오카의 문체 자체에 빠져버렸고, 이후 토론을 하면서 더 재밌는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요시오카 미노루의 후기 시 특징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시를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말이라 하면 정말로 소리 내어 내뱉어진 , 어설픈 책상물림의 지적 인용과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저는 요시오카 미노루를 읽으며 장정일의 천둥벌거숭이성과 황지우의 교활함을 동시에 느꼈는데, 그는 실제로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이후 상업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중퇴를 한 게 학력의 전부인 시인이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요즘의 한국은 다른 이유로 아니지만) 작가입네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이 대부분 고학력자인 곳에서, 장 주네와 마찬가지로, 장정일과 마찬가지로, 요시오카 미노루의 언어에 거침도 한계도 없을 것만 같은 동물적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착각이라 치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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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문학이 되는 장소는 어디 쯤일까요? 저는 요새 한국에서 과연 근대문학이 성립하였는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문학은 문학이라는 단어 자체도 번역어로서 성립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근본적으로 서구적이고, 근본적으로 제국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런 문학을 넘어 문학을 한다는 것이 과연 적당히 다름과 평등과 다양과 소수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으로 가능한지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일본 근대 문학의 성립이 제게 있어서는 자신들만의 장르의 구축과 긴밀한 연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엉터리 방터리일지언정 프랑스 자연주의를 습득하려 했고, 그 결과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소설이라는 장르를 창출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필사적으로 서양을 따라잡으려던 노력에서, 서양의 언어를 받아들이려는 절박함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리 오가이 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모리 오가이의 독일어 노트, 일본어에 앞서 문학은 서양어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어로 시를 썼던 니시와키 준자부로 등, 아직 사전도 학습 자료도 미비했던 시절에 모국어의 한계를 넘어 괴물 같은 언어를 구사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들여오려고 했던 문학이, 번역이 있었기에 일본의 아방가르드는 단순한 번역어로서의 전위前衛가 아닌 전위顚位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결과로 오히려 (한국을 빼고?) 전 세계로 역수입된 히지타카 타츠미의 암흑무도와 요시오카 미노루의 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일본 문학의 한 장소이지 않을까, 이것이 저의 요즘 생각입니다.

 

조금 더 쓰고 싶지만 피곤해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문학에 관한 이러한 잡담이 듣고 싶다면 위에서 공지한 「작가와 작가 읽기」에 부디 참가 바랍니다. 5회만이 아니고, 다른 분야의 재밌난 분들을 섭외했는데, 사람이 없으면 그냥 끝내야 해서 좀 아쉬운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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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타츠미 관련 이재인님 논문:

히지카타타츠미_이재인.pdf
2.67MB
히지카타타츠미2_이재인.pdf
0.89MB

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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