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人在此岸身被重繫,空喚彼岸言:『來渡我去。』
- 『불설장아함경』 16권 중에서 

Dass ich dereinst, an dem Ausgang der grimmigen Einsicht, 
Jubel und Ruhm aufsinge zustimmenden Engeln.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제10비가」 중에서


1. 피안과 차안

9월 중순에는 피안(彼岸)을 찾느라 분주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안화를 찾아 쏘다녔다는 말이 맞겠다. 일본 명절에는 오히간(お彼岸)이 있다. ‘히간’(피안)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오히간은 불교 영향으로 헤이안 시대부터 계속되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한국과 중국에 없는 피안의 날이 따로 있는 것도 신기한데, 피안의 꽃이 있다는 말에 더욱 마음이 동했다. 일본어로는 히간바나(彼岸花)라 불리는 이 꽃은 원산지인 중국에서 만주사화(曼珠沙華), 한국에서는 꽃무릇이라는 이름으로, 또 구근이 마늘과 닮아 석산(石蒜) 또는 돌마늘이라고도 불리운다. 보기 드문 꽃이 아니라건만 조금도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곧 있으면 4년간의 도쿄 생활을 마무리하고 멕시코시티에서 한동안 생활하게 되는데...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가기에 앞서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기로 결심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탓에 꽃을 찾아 다니며 몸도 마음도 증발하는 느낌이었고, 머리 속에서는 피안은 뭐고 차안은 또 무엇인지, 이곳과 저곳은 무엇이며, 지시사들은 어떻게 태동하였는지 등등의 생각이 어지럽고도 모호하게 떠돌았다. 이틀 간 땡볕을 돌아다녔으나 피안화가 핀 모습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히간에 먹는다는 싸리떡을 사러 갔다가, 가게 옆 놀이터에서 매년 피안화가 핀다는 말을 들었다. 



화단 한 켠에는 무언가가 올곧이 꽃대를 뻗고 있었다. 온종일 찾아 다녀도 보이지 않고, 마음 속에서만 불어나는 신기루 같던 저편의 꽃이 이편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작게 내미려는 빨간 꽃잎에 나이가 들었는지 마음도 설레었다. 아직 피지 않은 예감이야말로 내가 찾던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고, 집에 돌아와 피안과 차안에 대해 알아보기를 시작했다.

현대 언어로 찾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저쪽 언덕을 뜻하는 피안은 도피안(到彼岸)에서 유래하였으며, 도피안과 유의어인 바라밀 또는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पारमिता pāramitā)의 음역이다. 중국이나 티베트 불교의 해석 방식에 의하면 ‘너머pāra’를 목적어로 삼는 대격 ‘pāram’에, 가다를 의미하는 ‘√I’가 붙고, 마지막으로 접미사 ‘tā’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즉 미혹의 ‘이쪽 언덕(此岸)'에서부터 깨달음의 ‘저쪽 언덕(彼岸)’으로의 이행을 뜻한다.

이렇듯 피안이라는 말의 범용적 쓰임은 알겠는데, 정확히 어느 문맥에서 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를 피안으로 옮기게 되었는지, 또 이러한 번역의 시작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피안의 대립어로서의 차안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등을 알기는 쉽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어,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에서 제공하는 『통합대장경』과, 도쿄대학교의 『다이쇼 신수 대장경』 디지털본, 그리고 고대와 현대의 여러 언어로 원문과 번역문을 제공하는 사이트 Sutta Central를 더듬거리며 조금씩 원하는 정보에 근접해 갔다.

우선 『반야바라밀다경』을 찾아보았는데, 경전의 이름은 600권에 달하는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प्रज्ञापारमिता सूत्र prajñāpāramitā sūtra)를 음역한 것으로, 앞 부분은 최초의 삼장법사 구마라집이 한역해 『금강경』으로 불리우고, 뒷부분은 현장법사가 260자로 간추린 『반야심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짧은 반야심경의 경우 ‘바라밀다’라는 표현은 있으나 ‘피안’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경의 대부분을 번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구마라집 역, 404년)과  『대반야바라밀다경』(현장 역, 663년) 을 뒤져보았는데, 비슷한 대목을 둘 다 ‘피안’으로 옮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菩薩摩訶薩欲到有爲、無爲法彼岸,當學般若波羅蜜。菩薩摩訶薩欲知過去未來現在諸法如、法相、無生際者,當學般若波羅蜜。
보살마하살이 유위ㆍ무위의 법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 (김형준 중역)
『마하반야바라밀경』, 1권 중에서.

若菩薩摩訶薩欲於一切法度至彼岸者,當學般若波羅蜜多。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에서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하면 의당 반야바라밀다를 배워야 하옵니다.(송성수 중역)
『대반야바라밀다경』, 10권 중에서.

한역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저 언덕에 다다르기(到彼岸)’ 위해서는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를 배워야하기에, 결과적으로 도피안과 바라밀이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으니, 경전이 오래되어 원문의 진위도 불분명할뿐더러, 예의 문장에서는 피안과의 대립으로 차안이라는 개념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산스크리트어로 ‘너머로 간다pāramitā’라는 서술어가 어떻게 ‘피안’이라는 명사로 자리잡아 종래 없던 개념으로 정착될 수 있었는지, 그 시작은 누구였는지가 궁금해졌다. 이를 위해 한역에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함께 쓰인 경전을 찾고자 하였고, 그 결과 축불념(竺佛念)과 불타야사(佛陀耶舍)가 413년에 공역한 『불설장아함경』에 이르렀다 : 

於我賢聖法中,爲著、爲縛,爲是鉤鎖。彼三明婆羅門爲五欲所染,愛著堅固,不見過失,不知出要,彼爲五欲之所繫縛。正使奉事日月水火,唱言:‘扶接我去生梵天者。’無有是處。譬如阿夷羅河,其水平岸,烏鳥得飮,有人在此岸身被重繫,空喚彼岸言:‘來渡我去。’彼岸寧來渡此人不?”
答曰:“不也。”
우리 현성의 법 가운데에서는 그것을 집착이라 하고 결박이라 하며 갈고리와 쇠사슬이라고 한다. 저 3명 바라문들은 다섯 가지 욕망에 물들고 애착이 굳어져서 그 허물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그는 다섯 가지 욕망에 묶여 있다. 그들은 해와 달과 물과 불을 섬기며 ‘저를 인도하여 범천에 태어나게 하십시오’라고 외치지만 그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아이라하(阿夷羅河)의 물이 기슭까지 가득 차 까마귀나 새들도 그 물을 먹을 수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이쪽 기슭에 몸이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 부질없이 저쪽 기슭을 향해 와서 ‘나를 그쪽 기슭으로 건네주시오’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저 기슭이 와서 이 사람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
그는 대답했다. “안 됩니다.”(동국역경원 중역)
『불설장아함경』, 16권 중에서.

『불설장아함경』에서는 위와 같이 차안과 피안이 개념적으로 명백한 대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경전은 404년 구마라집이 번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보다 늦었지만, 불타야사가 구마라집의 스승이었으며 구마라집의 초청으로 축불념과 함께 장안에서 『불설장아함경』 을 번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피안’과 ‘차안’이라는 번역어와 그 개념의 성립은 역경가들 사이에서 충분히 공유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차안에 앞서 피안이라는 단어는 최초로 한문으로 불경을 번역하였다고 알려진 안세고(安世高)가 148년에서 170년 사이 작업한 『불설아난문사불길흉경』에도 이미 나와 있기에, 어쩌면 이러한 개념정립은 보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불법이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일 가능성도 크다.

피안과 차안이라는 번역어가 언제쯤 누구에 의해 성립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다소 풀렸으나, 팔리어 경전과 비교하며 읽는 과정에서 해당 명사들이 원문과 일대일 대응관계에 놓여 있지는 않아 보였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불설장아함경』의 원문으로 사료되는 팔리어본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를 살펴보았다.

Atha puriso āgaccheyya pāratthiko pāragavesī pāragāmī pāraṁ taritukāmo.
So orime tīre daḷhāya anduyā pacchābāhaṁ gāḷhabandhanaṁ baddho.
Taṁ kiṁ maññasi, vāseṭṭha,
api nu so puriso aciravatiyā nadiyā orimā tīrā pārimaṁ tīraṁ gaccheyyā”ti?
“No hidaṁ, bho gotama”.

Then along comes a person who wants to cross over to the far shore.
But while still on the near shore, their arms are tied tightly behind their back with a strong chain.
What do you think, Vāseṭṭha?
Could that person cross over to the far shore?”
(Bhikkhu Sujato 역, 2018년)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13 중에서.

팔리어 경전의 말미를 주목할 경우, 다른 번역본들에서 생략된 대립이 눈에 띈다. 바로 pārima tīrā와 orimā tīrā의 대립인데, 직역하면 ‘먼 언덕’과 ‘가까운 언덕’이 된다. 모르긴 해도, 불타야사와 축불념을 비롯한 다른 역경가들 또한 이 두 단어의 대립에서 ‘피안’과 ‘차안’이라는 구체적 개념을 착안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인용 경전의 다른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차안과 피안은 언제나 원문의 같은 단어를 있는 그대로 옮긴 결과물이 아니다. 때에 따라 pāra에 부정접미사a를 더한 apārā가 대립를 이루기도 하고, 명사가 아닌 서술어나 다른 표현 등을 역경가들의 해석에 따라 ‘피안’ 또는 ‘차안’으로 옮긴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이처럼 동사가 포함된 서술구문이 명사화를 통해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세계화라는 명목하에 납작해진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날과 달리, 전혀 다른 시간관 및 세계관을 담지한 고대 언어를, 어족마저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까다로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법을 설파하게 되는 꼴인데,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번역을 하였을까. 하물며 자신이 속한 세계의 바깥을 감지하지 못하던 사람들의 언어로 불경을 옮기고, 사람들이 번역된 경전을 자신에게 들일 수 있게 만들려면, 경전의 핵심을 좀 더 명료한 개념으로 전달하는 것이 당시 역경가들에게는 필수불가결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2.  ‘이’와 ‘그’와 ‘저’, 그리고 너머.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세계를, 영상을, 뜻을, 명사를, 동사를, 소리를 담을 수 있는 한자의 특성상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개념화는 필연적일 수 있겠으나, pārima tīrā와 orimā tīrā를 ‘안’과 ‘안’으로 직역하지 않고 구태여 ‘안’과 ‘안’으로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주의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지시사다. 흔히 ‘이’, ‘그’, ‘저’로 대변되는 지시사를 이해하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어 보여도, 기실 외국어 습득 및 번역에 있어 지시사는 지극히 까다로운 부분이다. 지시사는 대개의 언어에서 2원적체계 혹은 3원적체계로 기능한다. 예컨대 중남미 스페인어에서는 어느 한 점을 기준으로 할 경우, 그 기준에서부터 가까운 곳을 acá(여기), 보다 먼 곳을 ahí(저기), 그리고 요원한 곳을 allá(그곳)이라 지칭한다. 반면 피차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어는 일반적으로 ‘여기’와 ‘저기’라는 2원적 체계의 지시사를 가진 언어로 알려져 있고, 또 이러한 2원적 체계이기에 가능한 대립이 ‘피안’과 ‘차안’이라는 번역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3원적이든 2원적이든 지시사의 쓰임이 언어에서 항상 일관하지는 않다. 지시사가 형용사로 쓰이는지 명사로 쓰이는지 부사로 쓰이는지에 따라, 혹은 기준점이 심리적인지 실제적인지, 시간적인지 공간적인지, 청자인지 화자인지 등등에 따라 같은 언어에서도 지시사가 결여 혹은 혼동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 한들, 각자의 모국어와 다른 외국어의 지시사를 사용하고 이용하는 데의 어려움은 재앙으로 치부할 것만은 아니다. 되레 지시사의 애매함으로 인해, 고전 뿐 아니라 근현대 문학 번역에서도 까다로운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끝나지 않는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의 번역만 보아도 그렇다. 『팔방치기』는 총3부로 구성된 장편 소설인데, 1부 ‘저편으로부터(del lado de allá)’는 주인공에게는 타향인 파리가 배경이며, 2부 ‘이편으로부터(del lado de acá)’는 고향에 해당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나 영어 번역자는 위 소제들을 옮길 때 지시형용사 this와 that, 혹은 지시대명사 here와 there의 대립을 피해 부러 ‘from the other side’와 ‘from this side’로 1부와 2부의 제목을 옮겼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독일어에서는 언덕(Ufer)이라는 단어까지 집어넣어 ‘다른 편 언덕으로부터(von anderen Ufer)’와 ‘이편의 언덕으로부터(vom hiesigen Ufer)’라고 명약관화 불교적 개념이 깃든 단어로 옮김으로써, 작품이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 백인과 흑인, 핫 재즈와 쿨 재즈 등의 이분법적이며 데칼코마니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너머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Yo uppatitaṁ vineti kodhaṁ,
Visaṭaṁ sappavisaṁva osadhehi;
So bhikkhu jahāti orapāraṁ,
Urago jiṇṇamivattacaṁ purāṇaṁ.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법정 역, 1999년)
『숫타니파타』, 1.1, 「뱀의 비유」 중에서.

지시사와 관련하여 다시 차안·피안 문제로 돌아와 보겠는데, 인용문의 orapāraṃ은 앞서 불타야사와 축불념이 피안으로 옮겼던 pārima에 orima가 결합된 합성어다. 그런데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나 일본어 번역에서도 피안과 차안 외에 다른 단어를 부러 선택하는 경향이 보인다. 짐작컨대, 허물마냥 벗어버릴 피안은 수행자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피안과는 맞지 않는 개념이기에 그러하리라. 즉 「뱀의 비유」에서 말하는 피안이란 절대적인 피안이 아니라 orima와 마찬가지로 어차어피 사바세계에 묶인 상대적 피안이며, 진정한 피안에 도달하는 방편이다. 물론 불법에 과문한 사람으로 외람된 말일 수 있으나, 이와 같은 언어의 혼잡과 모순은 현대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방식, 끊임없이 실체가 없는 말을 세움으로써 더는 말이 설 수 없는 불립문자에 이르는 방식이야말로 불법의 언어이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3. 음(音)과 상(像)을 옮기기, 그리하여 정(情)을 옮기기

피안을 찾아 피안화를 찾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저편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해보려 애쓰는 시간이 마냥 낯설거나 괴롭지만은 않았다. 어느새 지순한 시를 읽고 옮길 때와 흡사한 마음가짐이 되었다. ‘바라밀다’와 같이 불경 번역에서 음역이 유독 많은 이유는 불경의 내용만이 아니라 부처의 말 자체가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일 테다. 시를 읽고 번역할 때에도 말에 대한 이러한 존중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의미에만 치중하기보다는 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의미와 소리가 섞여 들며 빚어내는 영상에 주목하며, 이들의 종합적인 작용으로 환기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기게 된다.

Wer, wenn ich schriee, hörte mich denn aus der Engel
Ordnungen ? und gesetzt selbst, es nähme
einer mich plötzlich ans Herz: ich verginge von seinem
stärkeren Dasein. Denn das Schöne ist nichts
als des Schrecklichen Anfang, den wir noch grade ertragen
누구냐, 나 울부짖은들, 천사의 대열에서 그 누가
내 울음에 귀 기울여준단 말이냐? 심지어 그중 한 천사가
순간 나를 가슴에 품더라도, 보다 강한 존재로 인하여 
나 사라질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내는
저 끔찍한 것의 시작일 따름이기에(필자 역)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 비가』, 「제1비가」 중에서

근현대 작품을 기획·출판하는 등 비교적 다양한 방식으로 시를 접하고 소개하였지만, 시를 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다름 아닌 『두이노 비가』이다. 몰개성적으로 개성을 탐하는 대다수의 문학과 달리, 비가는 오래도록 내게 쉬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간 비가의 도입부에서 시적 화자는 천사를 감지한다. 그러나, 인식의 한계 바깥에 있는 천사에 화자는 마냥 기뻐하지도 못한 채, ‘보다 강한 존재’로 자신이 소멸할까 두려워 어쩔 줄을 모른다. 이처럼, 감당 못 할 끔찍한 존재를 온전히 감당하기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도피안에 가깝다. 그러나 도피안은 뭇 인간적 감각을 초월한다. 그런데, 초월을 지향하는 데 있어 굳이 시여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오히려 소수의 종교나 철학적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혹여 시를 포함한 문학이란 그 이전 단계의 인간적 유흥거리에 지나는 것이 아닐지? 일련의 의문이 비가를 접함과 동시에 시작되었고, 오래동안 나를 괴롭혔다.

wir liebend
uns vom Geliebten befrein und es bebend bestehn:
wie der Pfeil die Sehne besteht, um gesammelt im Absprung 
mehr zu sein als er selbst. Denn Bleiben ist nirgends.
이제는 우리가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어, 떨면서 견뎌낼 시간이 아니겠는가?
마치 시위를 견딘 화살이 집약된 힘으로 날아가 그 자신으로,
그 이상으로 존재하려는 듯이. 이제 그 어디에도 머무름이란 없기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 비가』, 「제1비가」 중에서

5년에 걸쳐 『두이노 비가』를 번역하는 동안 고민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고민에 대한 해답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기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기에 반문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릴케는 종교나 철학에 기대지 않고 오직 시로만 가능한 방식을 보여준다. 인간의 몸뚱어리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가까스로 자신의 한계에 서서 초월을 바라보기, 이것이 바로 ‘떨면서’, ‘견뎌’내는 것이고, 그래야 비로소 ‘마치 시위를 견딘 화살이 집약된 힘으로 날아가’, ‘그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심신의 번잡을 감인하고 동네를 걸으니 어느덧 여름이 지났다. 피안화가 피어나려던 줄기에서 이미 꽃잎은 시들었다. 돌아오는 길 어느 어둠 깔린 현관에서 누군가 느리게 손을 움직인다. 집은 할머니가 돌보는 화초로 가득하고, 한쪽 문에 달린 칠판에 꽃 한송이 피었다. 매달 새로운 꽃을 칠판에 그린다는데, 왼쪽에는 ヒガンバナ라고 가타카나로 꽃 이름이 적혀 있다. 피안화는 mahā-mañjūṣaka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하여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라고도 불리운다. 천상에 피는 붉은 빛의 커다란 연꽃으로, 그 앞에서 사람은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할머니가, 한 점 그림이, 내게는 바로 그 꽃이었나 싶다.

가을이 왔다.

2024년 10월8일, 도쿄에서.

최성웅(monvasistas.com) : 문학번역가 및 어학강사. 1984년 9월 21일 출생. 서울과 파리, 베를린, 뮌헨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5년 3월 출판사 읻다를 설립, 2017년 말까지 대표로 역임하며 ‘괄호시리즈’, ‘읻다시인선’ 등을 기획 및 출판하였다. 이후 2년 간 키토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리고 2020년 말부터는 도쿄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2022년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와의 하룻밤』 문체연구로 석사논문을 발표하였으며, 현재 중남미문학 가운데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2024년 9월 ‘옮김과 들임’을 설립하여 외국어어와 문학 및 번역 관련 유·무료 모임과 강의를 제공한다. 프랑스어권에서는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 에드몽 자베스의 『예상 밖의 전복의 서』 등을, 독일어권에서는 릴케의 『두이노 비가』 등을 옮겼으며, 현재는 스페인어권에서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 『유희의 끝』 등을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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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통신 '저편으로부터' 제8회 시작에 앞서, '옮김과 들임'에서 주최하는 무료 독일어・희랍어 수업에 대해 알립니다.

다가오는 10월부터 독일어와 고전 그리스어 문법을 개괄하기 위한 수업을 진행합니다.
독일어 수업은 저 최성웅이, 희랍어 수업은 제 친구이자 희랍어 선생 이호섭이 담당합니다. 별도의 수업료는 없습니다. 다만 후원금을 통해 운영되는 만큼, 여유가 있으시다면 모임의 지속 및 차후 강의 등의 활동을 위해서 힘을 보태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수업을 신청하고 싶으시거나 '옮김과 들임'의 활동에 관심 있으신 분은 홈페이지(monvasistas.com)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릴케의 『두이노 비가』 정독 모임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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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으로부터' 제8회 — 이쪽에 묶여 저쪽을 부르짖기

有人在此岸身被重繫,空喚彼岸言:『來渡我去。』
- 『불설장아함경』 16권 중에서

 

 

요 며칠 피안彼岸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피안화彼岸花를 찾아 쏘다녔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한국의 '백중절'이나 멕시코의 '망자亡者의 날el día de los muertos'처럼, 일본에는 오히간お彼岸이있습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과 추분 각각 일주일 동안이 이에 해당되며, 봄의 오히간에는 보타모찌를, 가을 오히간에는 오하기를 먹습니다.

 

 

보타모찌牡丹餅와 오하기お萩는 멥쌀과 찹쌀을 섞어 찐 것을 팥앙금에 묻힌 떡으로, 계절에 따라 달리 부를 뿐 실상 같은 음식입니다. 씹히는 쌀이 제맛인 떡에 팥앙금 대신 흑임자나 콩가루 등을 묻혀 팔기도 하는데, 봄과 가을에 각각 피어나는 모란牡丹과 싸리萩 꽃을 팥 알갱이에 비유해 보통은 팥떡을 떠올립니다.

오히간お彼岸은 피안彼岸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불교의 영향으로 헤이안 시대부터 계속된 명절입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 춘추분에 이승此岸과 저승彼岸의 거리도 가장 짧아진다고 생각하 조상을 기리는 날로 삼았다 합니다.

일본에 온 지 4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크게 신경쓰지 않은 날이었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한 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만주사화曼珠沙華, 한국에서는 꽃무릇이라고 불리우며, 구근식물로 비늘줄기의 외형이 마늘과 비슷 석산石蒜 혹은 돌마늘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 꽃의 이름은 히간바나彼岸花, 그 이름 때문인지 섬찍할 정도로 붉은 색 때문인지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이 꽃을 자세히 보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올해의 추분은 어제 9월22일이었고, 앞뒤 3일을 포함한 일주가 오히간이었기에, 그 첫 날인 19일부터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디선가 보였던 것 같은데, 막상 배회하다 보니 볼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지 낮에는 36도까지 기온이 올라갔고, 더위 속에서 몸과 마음이 증발해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를 공치고서 돌아오는 길에 몇몇 꽃집에 들려도 일반적으로 취급하지 않는 꽃이라는 말을 들었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니 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인 20일에도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고, 여름은 여전히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무엇에 홀렸는지 어떻게든 보고 싶다는 마음에 동네 돌아다녔습니다.
다섯 시면 절은 문을 닫기에 그 전에 찾아봐야 했고, 땡볕 아래를 돌아다니느라 피부 거죽을 타들어가고 일사병인지 머리는 멍해져 갔습니다. 머리 속에서는 피안彼岸이 무엇이지 차안此岸은 또 무엇인지, 이곳과 저곳은 무엇이며, 지시형용사들은 어떻게 태동하였는지 등등의 생각이 어지럽고도 모호하게 떠돌았습니다.

 

 

한 절의 묘지를 관리하시는 분이 올 해는 늦더위로 아직 히간바나가 피지 않은 것 같다고, 그래도 근처 야나카 공동묘지에 가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야나카 공동묘지는 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커다란 공동묘지로 도쿄3대 묘지로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묘지를 좋아해서 이런 저런 나라에서 묘지를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혐오시설이라며 죽음도 주검도 몰아낸 도시에서 자라났기에 더욱 불안에 시달렸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지척에 죽음을 두고, 받아들이고, 향을 피우고, 생각하고, 그 죽음을 삶에서 영위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요? 이곳과 저곳을 나누지 말고 그저 삶에서 죽음을, 죽음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째서 나는 이곳에 묶여 저쪽을 부르짖고 있는지, 어째서 그럼에도 피안화는 보이지 않는지... 별에별 잡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다다른 야나카 공동묘지에서는 고양이들을 만났습니다. 고양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늘어지거나 조금은 여름에 눌린 듯한 걸음으로 그럼에도 종종, 끊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을 감인堪忍하고 있었습니다. 

피안화는 찾을 수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 허기를 달래려 떡집에 들어가 맛 별로 피안의 떡 오하기를 하나씩 총 다섯 개를 샀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피안화 이야기를 꺼냈더니 가게 바로 옆 작은 공원에 해마다 몇 송이의 피안화가 꽃을 티우는데 올해는 더워서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화단 한 켠에는 올곧이 뻗어나오는 줄기들이 있었습니다. 온종일 찾아다녀도 보이지 보이지 않고, 마음 속에서만 불어나는 신기루 같은 저편의 꽃이 이편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작게 내미는 빨간 잎에 처음으로 마음이 설레였습니다. 아직 피지 않은 예감이야 말로 제가 찾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의 아지트 부쟁고로 가서 오하기를 먹으며 줄곧 의문이었던 피안과 차안에 대해 알아보기를 시작했습니다.

거진 10시간이 넘게 걸려 알아보았지만 어떤 언어로도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언어로 위키페디아 등을 뒤져 보니 저쪽 언덕을 뜻하는 피안彼岸이라는 단어는 도피안至彼岸에서 유래한 것으로, 바라밀波羅蜜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명 뿐이었습니다. 

바라밀(婆羅蜜) 또는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어 빠라미따(पारमिता pāramitā)를 음역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티베트 불교에서의 해석 방식에 의하면 '너머pāra'를 목적어로 삼는 대격 'pāram'에, 가다를 의미하는 '√i'가 붙고, 마지막으로 접미사 'tā'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즉 미혹의 '이쪽 언덕此岸'에서부터 깨달음의 '저쪽 언덕彼岸'으로의 이행을 뜻한다 합니다.

다만 피안이라는 말이 범용적으로 쓰여지는 것은 알겠는데 그럼 정확히 어느 문맥에서 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를 피안으로 번역하게 되었는지, 이러한 번역의 시작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피안의 대립어로서의 차안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주어진 정보들 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찾아보니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은 600권에 달하는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산스크리트어: प्रज्ञापारमिता सूत्र prajñāpāramitā sūtra)의 음역으로, 이 중 앞 부분은 최초의 현장법사인 구마라집이 한역하여 한국에서는 흔히 『금강경』으로 불리우고, 뒷부분 내용은 현장법사가 260자로 간추려 『반야심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반야심경에는 '바라밀다'라는 역어는 보여도 '피안'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야경 전체 번역에 해당하는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구마라집 역, 404년)과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현장 역, 663년) 을 뒤져보았는데, 비슷한 대목으로 보이는 곳을 둘 다 '피안'으로 옮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菩薩摩訶薩欲到有爲、無爲法彼岸,當學般若波羅蜜。菩薩摩訶薩欲知過去未來現在諸法如、法相、無生際者,當學般若波羅蜜。
"보살마하살이 유위ㆍ무위의 법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김형준 중역)
『마하반야바라밀경』 1권(ABC, K0003 v5, p.229c02-c05)

若菩薩摩訶薩欲於一切法度至彼岸者,當學般若波羅蜜多。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에서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하면 의당 반야바라밀다를 배워야 하옵니다.(송성수 중역)
『대반야바라밀다경』 10권(ABC, K0001 v1, p.82c22-c23)

결국 한역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저 언덕에 이르는 행위(至彼岸)는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을 배움이기에 이 둘이 결과적으로 동의어임은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의문은 더해만 갔는데, 오래된 경전이니 만큼 반야경의 원문의 진위에 불분명한 점이 있기도 하고, 예의 문장에서는 피안과의 대립으로 차안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부처가 설법한 언어가 산스크리트어 혹은 팔리어, 아니면 그 둘 사이 어느 언어 쯤인 것 같은데, 산스크리트어로는 '너머로 간다pāramitā'는 서술어가 '피안'이라는 명사로 자리잡으며 종래에 없던 개념이 만들어 질 수 있었는지, 그 시작은 누구였는지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한역에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함께 쓰인 문장을 찾고자 하였고, 그 결과 축불념(竺佛念)과 불타야사(佛陀耶舍)가 413년에 공역한 『불설장아함경』 에 이르렀습니다 : 

於我賢聖法中,爲著、爲縛,爲是鉤鎖。彼三明婆羅門爲五欲所染,愛著堅固,不見過失,不知出要,彼爲五欲之所繫縛。正使奉事日月水火,唱言:‘扶接我去生梵天者。’無有是處。譬如阿夷羅河,其水平岸,烏鳥得飮,有人在此岸身被重繫,空喚彼岸言:‘來渡我去。’
우리 현성의 법 가운데에서는 그것을 집착이라 하고 결박이라 하며 갈고리와 쇠사슬이라고 한다. 저 3명 바라문들은 다섯 가지 욕망에 물들고 애착이 굳어져서 그 허물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그는 다섯 가지 욕망에 묶여 있다. 그들은 해와 달과 물과 불을 섬기며 ‘저를 인도하여 범천에 태어나게 하십시오’라고 외치지만 그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아이라하(阿夷羅河)의 물이 기슭까지 가득 차 까마귀나 새들도 그 물을 먹을 수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이쪽 기슭에 몸이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 부질없이 저쪽 기슭을 향해 와서 ‘나를 그쪽 기슭으로 건네주시오’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불설장아함경』 16권(ABC, K0647 v17, p.961b13-b20)

『불설장아함경』 에서는 위와 같이 차안과 피안이 개념적으로 명백히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404년에 구마라집이 번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보다 늦게 번역되었지만, 불타야사가 구마라집의 스승이었다는 점과, 구마라집의 초청으로 축불념과 함께 장안에 와서 『불설장아함경』 을 번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피안'과 '차안'이라는 번역어와 그 개념의 성립은 이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차안에 앞서 피안은 최초의 불경 번역자 중 하나로 알려진 안세고(安世高)가 148년에서 170년 사이에 한역한 『불설아난문사불길흉경』에도 이미 나와 있기에, 이러한 개념의 정립은 어쩌면 불법이 중국에 퍼졌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안과 피안의 대립은  『불설장아함경』 의 원문에 해당하는 문장을 참조할 경우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

Then along comes a person who wants to cross over to the far shore.
But while still on the near shore, their arms are tied tightly behind their back with a strong chain.(Bhikkhu Sujato 역, 2018년)
Atha puriso āgaccheyya pāratthiko pāragavesī pāragāmī pāraṁ taritukāmo.
So orime tīre daḷhāya anduyā pacchābāhaṁ gāḷhabandhanaṁ baddho.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따라서 불타야사와 축불념은 원문의 orima(nearest, nearer; on this side)와 pārima(yonder; farther)를 대립관계로 파악하고서, 이 둘을 차안과 피안으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한문에서 불교용어는 원어라 볼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에는 없는 지시사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고, 그를 통해 보다 명료한 개념적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다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지시사에 대한 이해는 생각만큼 쉽지가 않기에, 고전을 다룰 때에는 보다 섬세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실제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는 지시사가 별도로 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3인칭대명사 tad를 변형하여 사용하기에 문맥에 따라 프랑스어의 지시사 'ce'와 마찬가지로 '이', '그', '저'로 모두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차안과 피안이라는 용어는 불경의 세계를 한문으로 담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개념 명사라 할 수 있을 테고, 실제 다른 문장이나 단어들을 이 두 단어로 통일해서 번역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If you practice in accordance 
with each of these questions
as taught by the Buddha,
you’ll go from the near shore to the far.(Bhikkhu Sujato역, 2018년)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는
눈 뜬 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 이를 것이다.(법정 역, 1991년)

위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말씀에 가장 가까운 자료로 손꼽히는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서도 제일 먼저 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피안도품」의 일부입니다. 아함경 위주로 받아들였던 한국 불교에서는 무소유로도 유명하였던 법정 스님의 번역으로 1991년에 처음 그 면모가 알려졌다고 합니다. 법정 스님의 번역은 일본어의 중역인데, 일본은 1927년부터 1984년까지 다섯 개의 번역 판본이 있었고, 그 중 어떤 번역을 참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앞서 orima와 pārima의 경우와는 조금 달리, 위에서는 너머를 뜻하는 pāra와 에 부정접미사a를 더한 apārā를 각각 피안과 차안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에서 이此와 저彼는 화자의 인식 안에서의 상대적 거리를 가리키는 지시사가 아닌, 인식의 안과 그 너머를 가리키는 절대 지시사로 기능하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 되는 '어차피於此彼'라는 단어에서의 '이렇든 저렇든'은 동일한 위계 속에서의 이곳과 저곳을 가리키지만, 불교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은 그러한 대립을 넘어섭니다. 즉 차안이라 일컬어지는 이승이요, 사바세계娑婆世界요, 감인토堪忍土에서부터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거센 흐름인 폭류暴流를 건너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피안일 테지요.

하지만 한문은 물론이고 한국어에서도 이此와 저彼는 혼용되어 사용될 뿐만아니라, 다른 언어와 문화들이 뒤섞이면서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에서 지시사들의 혼잡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예로는 제가 오래 작업중인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불교적 영향으로 작가가 『만다라』라는 제목도 염두하였던 『팔방치기』의 주인공은 아르헨티나 출신 올리베이라 오라시오로,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집니다. 제1부이자 보내드리는 문학통신의 제목이기도한 '저편으로부터'는 이방인인 주인공이 배회하는 파리가 배경이며, 제2부 '이편으로부터'는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제3부 '다른 편들로부터'에는 공상과 관념이 난무합니다.

이 소제목들의 영·독·불역을 보면 재밌습니다. 영어에서는 this와 that혹은 here와 there의 대립을 버리고 부러 the other side와 this side로 1부와 2부를 옮겼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차안과 피안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this shore'과 'the other shore'를 겨냥한 해석이며, 독일어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언덕UFER'이라는 단어까지 집어넣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기대고 있는 지시사 이/그/저의 불안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문맥에 따라 같은 단어여도 다르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심지어 불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법정 역, 1991년)

솟아난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마치 퍼진 뱀독을 약으로 다스림 같아라.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김출곤 역, 2016년)

뱀의 독이 퍼지는 것을 다스리듯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제압하는 사람은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석지현 역, 2016년)

〔全身に〕広がった蛇の毒を薬で制するように、こみ上げてくる怒りを制する比丘は、この世(俗世)を捨て去る。あたかも、蛇が、それまでの古くなった皮を捨て去るように。
온몸에 퍼진 뱀의 독을 약으로 다스리듯, 솟구치는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이 세상(속세)를 벗어버린다. 마치, 뱀이, 그간의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고시마 키요타카五島清隆  역, 2013년)

orapāraṃ이라는 단어는 앞서 불타야사와 축불념 차안과 피안으로 번역한 orima와 pārima가 합성된 것지만 역자들은 모두 차안과 피안을 피해 다른 단어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법정과 석지현의 경우 뜻은 한자와 같아 보일지언정 부러 '이 세상도 저세상도'와 '이 언덕과 저 언덕'라며 풀어 옮겼으며, 김출곤과 고시마 키요타카는 의식적으로 차안과 피안을 떠올릴 단어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해 김출곤과 고시마 키요타카는 각각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

김출곤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긴 “orapāraṃ”은 숫타니파타의 이 경에만 보인다. “oraṃ(아래, 아래로)”과 “pāraṃ(너머, 너머로)”이라는 두 부사가 결합된 낱말이다. 흔히 “이 세상 저 세상”으로 옮기고 있으나 이는 뚜렷한 경증이 없는 해석이다. “전후상前後想”처럼 심계발과 관련한 표현일 수도 있기에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겼다.

고시마 키요타카
orapāraについては、「劣った・卑近な(ora,Skt.avara)岸(pāra)」と解する他に、「此岸(ora)と彼岸(pāra)」と解して「この世とかの世」の意とする説がある。「此岸」に対する「彼岸(pāra)」はふつう「涅槃、悟りの境地」を指すが、「捨て去る」対象には合わないので、この場合、「この世とかの世」を「人間界と天人界」あるいは「欲界と色界」などと解釈するほかない。つまり、「様々な生存形態をとって流転し続ける輪廻的状態」を指すとするのである。しかし、いずれの解釈でもorapāraが「涅槃・悟りの境地」に対比される「この世・俗世・輪廻の世界」を指していることに違いはない。
(orapāra에 대해서는 '열등하고 비천한(ora, Skt.avara)의 기슭(pāra)'으로 해석하는 것 외에 '차안(ora)과 피안(pāra)'으로 해석하여 '이승과 저승'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 “피안에 해당하는 pāra 보통 '열반,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키는데, 이는 '버리는' 대상에 부합하지 않기에 그럴 경우에는 '이승과 저승'을 '인간계와 천인계' 혹은 '욕계와 색계' 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즉, '다양한 생존형태를 취하며 계속 윤회하는 윤회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든 orapāra가 '열반, 깨달음의 경지'와 대비되는 '세속, 속세, 윤회의 세계'를 가리킨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즉 같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불경이라 할지라도, 경전에 따라 문맥에 따라 지시 대상들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 텐데, 이는 절대적으로 해석의 주체인 번역자가 불법을 어느 정도로 깊이 이해하느냐에 달린 일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법도 산스크리트어도 팔리어도 전혀 모르는 저에게 「뱀의 경」은 유독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찾으려던 피안도 피안의 꽃도 사실은 이쪽에 묶여 너머를 보지 못하는 사람의 집착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이쪽도 저쪽도 어차어피於此於彼 모두 버리고, 나아가 너머에 대한 생각마저 버려야 조금이라도 감지될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피안도 차안도 모두 잊어야 할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간의 심신 고통스러운 생각을 감인하고 나자 추분이 지나갔고,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오늘 다시 공원에 가 보니 피어나지 않을 것 같던 피안화도 결국엔 꽃을 피어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이 왜인지 아쉬워 돌아돌아 처음 들어선 길에서 마냥 아름다운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동네 할머니를 한 분 알게 되었는데, 할머니의 집은 여러 꽃과 식물들로 가득했고, 한 쪽 문에는 칠판을 달아 매 달 새로 꽃 그림을 그리신다고 하십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피안의 꽃이 그 어떤 실물보다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것이 형언하기 힘든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피안화는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또는 '대홍연화大紅蓮華'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mahā-mañjūṣak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입니다. 마하만주사화는 천상에 핀다는 붉은 빛의 커다란 연꽃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하는데, 할머니의 한 점 그림이 제게는 바로 이 꽃이었나 봅니다.

비로소 가을이 왔습니다.

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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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통신은 어쩌다 보니 6회에 연달아 곧장 보냅니다.

 

7회는 기존에 번역한 『두이노 비가』의 재출간을 위해, 편집부를 설득하고자 쓴 글입니다. 제 작업을 보아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는 제 번역이나 입장을 드러내는 글을 평소 쓰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독자라면 오직 자신의 눈으로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제 번역을 표절해도 어설픈 비평을 해도 개의치 않으며, 제 번역을 주장하는 글이라면 지금껏 일본에서 쓴 『테스트 씨』의 석사논문이 다입니다. 이번 글도 단지 출판사를 설득하기 위한 용도로 대충 쓴 잡문입니다. 다만 저를 응원해주시는 몇 안되는 분들도 어째서 제가 모든 작업 중에 『두이노 비가』를 중히 여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기에, 기왕 쓴 글을 통해 그런 의문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길 바랍니다.

 

다른 판본이 아닌 손재준 역과 비교한 것은 출판사 요청에 의한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두이노 비가』 번역 당시 스페인어, 프랑스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된 수십 편의 번역본들을 참고한 바, 개중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번역본이라면, -피에르 르페브르와 필립 자코테의 프랑스어본을 꼽겠습니다.

 

현재 제가 작업한 『두이노 비가』는 종이책이 절판되었으나, 헌책으로 시중에서 구할 수 있고, 또 전자책으로 구입 가능합니다. 언젠가 다시 종이책으로 선보일 수 있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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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두 번역의 결정적 차이는 번역문이 독립적으로 시적 문체를 이루고 있는가이지만, 이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기에 원문에 대한 해석과 그 선택에 대해서만 말한다.

 

 

「제1비가」 중에서

원문 :

(…) Ist es nicht Zeit, daß wir liebend

uns vom Geliebten befrein und es bebend bestehn:

wie der Pfeil die Sehne besteht, um gesammelt im Absprung

mehr zu sein als er selbst. Denn Bleiben ist nirgends.

 

손재준 역 :

우리가 사랑하면서

연인으로부터 벗어나, 떨면서 참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마치 화살이 힘을 모아 날아가서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 떨면서

시위를 견뎌 내듯이. 참으로 머무름이란 어디에도 없다.

 

최성웅 역 :

(…) 이제는 우리가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어, 떨면서 견뎌낼 시간이 아니겠는가?

마치 시위를 견딘 화살이 집약된 힘으로 날아가 그 자신으로,

그 이상으로 존재하려는 듯이. 이제 그 어디에도 머무름이란 없기에.

 

코멘트 :

『두이노 비가』에서 말하는 사랑은, 마음의 위안이든 육체적 보상이든 간에 보답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특히 연인 간의 사랑이란 외사랑이 아니라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로부터도 사랑받기를 갈구한다. 위 시구에서는 이러한 사랑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선 어떠한 비인간적인 사랑을, 인간을 넘어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사랑을 하기 위한 방식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릴케는 통상적으로 쓰는 표현에 이른바 낯설게 하기효과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원문1,2행을 살펴보면 ‘liebend’‘Geliebten’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는데, 각기 사랑하다라는 동사 ‘lieben’에서 파생된 현재분사와, 과거분사 ‘gelieb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Geliebte는 남성명사로 쓸 경우는 사랑받는 (), 여성명사로는 사랑받는 여자로 통상 사용되기에 손재준은 이를 연인으로 옮겼다.(이러한 번역은 손재준 외 다른 모든 한국어 역자도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제1비가」에서 릴케가 기리는 사랑이란 가스파라 스탐파와 마찬가지로 연인을 잃고서도 여전히 사랑하는자이다. 이는 인간적인 사랑의 범주를 넘어선 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최성웅은 현재분사와 과거분사가 지닌 근본적인 의미, 즉 사랑의 능동과 수동을 드러내고자 각각을 사랑함사랑받음으로 번역했다.

 

또한 손재준은 한국어의 일반적 어순에 맞춰 2행과 3행과 4행의 순서를 뒤섞어 번역했다 :

마치 화살이(wie der Pfeil) 힘을 모아 날아가서(um gesammelt im Absprung-3)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mehr zu sein als er selbst.-4)  떨면서 (es bebend bestehn-2) 시위를 견뎌 내듯이.

 

최성웅은 2,3,4행의 순서를 맞추어 번역했는데, 위 경우에는 그 차이가 본질적이다. 인간을 넘어선 사랑을 한다는 것, 이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초월 혹은 해탈이고, 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을 이름하는데, 릴케는 여기에서 신학과 철학이 아닌, 오직 문학으로만 가능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끊어내고 폭류를 건너기를, 부처가 되기를 가르치고, 철학에서도 이러한 초월 혹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육체에 감관(sens)를 지닌 존재로, 감각(sense)하고 의미(sense)지음으로써 하나의 방향(sense)을 지향하는 인간이 인간인 상태로 저 너머를 가기란 지난하다.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신학과 철학에서도 볼 수 있는 초월의 방식이다. 하지만 『두이노 비가』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몸뚱어리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그 존재를 버리지 않고 초월을 바라보는 방식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떨면서’, ‘견뎌내는 것이고, 그래야 평소 존재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치 시위를 견딘 화살이 집약된 힘으로 날아가’, ‘그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이성이 아니라, 문체로서 감동시키는 방식으로서, 문학으로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순서를 그대로 재현할 필요가 있다.

 

 

「제7비가」 중에서

원문 :

Werbung nicht mehr, nicht Werbung, entwachsene Stimme,

sei deines Schreies Natur; zwar schrieest du rein wie der Vogel,

wenn ihn die Jahreszeit aufhebt, die steigende, beinah vergessend,

daß er ein kümmerndes Tier und nicht nur ein einzelnes Herz sei,

das sie ins Heitere wirft, in die innigen Himmel.

 

손재준 역 :

구애가 아니다, 더는 구애가 아니다,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

그것이 네 외침의 본성이게 하라. 너는 상승하는 계절이 높이 품어 주는 새처럼 순수하게 외치리라,

그때 계절은, 거의 잊고 있는 법이다,

새가 근심에 차 있는 한 마리 짐승이라는 것을, 그리고 청명한 대기 속으로,

그 지순의 하늘 속으로 계절이 던져 올리는 오직 유일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최성웅 역 :

구하지 마라, 구해서는 아니 된다. 터져 나오는 소리가

외침의 바탕이 되게 하라. 새의 비명같이 순수해야,

솟아오르는 계절에 드높아지는 새처럼, 한낱 마음이 아니라,

불안한 짐승임을 거의 잊고서, 명랑함 속으로,

내밀한 하늘 속으로 내던져진다.

 

코멘트 :

우선 손재준의 위 번역은 원작의 행들을 뒤섞어 놓았을 뿐 아니라 비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은 Werbung 번역에 대한 차이다.

Werbung은 동사 werben을 명사화한 것인데, werben은 무언가 대상을 얻고자 애쓰거나’, ‘추구하려는의지나 작위가 개입된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Werbung은 현대에 있어 광고라는 뜻으로 제일 많이 사용되며, 연애에 있어서는 부러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하지만 「제1비가」에서 살펴 보았듯이, 릴케는 이러한 통상적인 사랑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고, 오히려 그러한 작위 때문에 진정한 사랑의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적인 의지보다 시에서는 언제나 ’, ‘사자’, ‘모기등의 비인간적인 사물이 보다 순수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는 단순 연인간의 사랑에 한정되는 일이 아닐진대, 손재준 외 다른 번역가들도 모두 구애라고 번역하여 총 10편의 『두이노 비가』가 그리는 대장정을 좁은 세계에 한정시켰다.

 

 

10비가에서

원문 :

Dass ich dereinst, an dem Ausgang der grimmigen Einsicht,

Jubel und Ruhm aufsinge zustimmenden Engeln.

 

손재준 역 :

나 언젠가 무서운 인식의 끝에 서서

화답하는 천사를 향해 환호와 찬미의 노래 크게 부르게 되기를.

 

최성웅 역 :

바라건대 나 언젠가, 하나로 보려는 가혹한 인식의 출구에 서서

화답하는 천사들에게 영예와 환희의 노래 올릴 수 있어라.

 

코멘트 :

「제1비가」에서부터 「제10비가」에 이르기까지 천사란 인간으로서 도무지 헤아릴 수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따라서 「제1비가」에서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라 부르짖으며, 그런 천사 중 하나가 나를 가슴에 품더라도’, ‘보다 강한천사라는 존재로 인하여나는 사라지고야 만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럼에도 이미 인간적 사랑의 한계를, 인간적으로 존재함에 한계를 깨달은 시인은 천사를 향하고 있으며, 「제10비가」는 그러한 대장정의 결말부에 해당한다. 나의 존재가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소리지르고, 상대를 끔찍하다고 여기던 시적화자는 비로소 인간의 개별자적 한계에 갇히지 않고서, ‘천사를 향해 환호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앞서 설명하였듯이 어디까지나 문학적이고, 그렇기에 『두이노 비가』가 근현대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행의 an dem Ausgang der grimmigen Einsicht 부분을 손재준은 무서운 인식의 끝에 서서라고, 최성웅은 하나로 보려는 가혹한 인식의 출구에 서서로 옮겼다.

 

즉 최성웅은 Einsicht, 영어로는 Insight에 해당하는 단어를 하나로 보려는 인식으로 옮겼는데, 이는 개별자로서의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나라는 자아이며 아집인 것에 심신이 사로잡혀 있고, 끊임없이 그러한 나를 다른 것과 동일시(identify)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를 지키고자 한다. 일본에서 처음 정립된 통찰Einsicht라는 단어는 이러한 개별자적 존재의 일관성을 긍정하는 단어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꿰뚫고, 손아귀로 쥐듯이 파악하려고, ‘인식하려고 든다. 하지만 그렇게 그러모은 나라는 개별자는 보다 강한 존재인 천사 앞에서 흩어지고 사그러들 따름이기에, 「제1비가」에서는 무력히 절규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제1비가」에서부터 「제9비가」까지를 거치며 (실제 비가는 순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 마침내 「제10비가」에서 자기 존재를 파괴할, 나라는 아집을 끊어낼 천사를 보고 찬미할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찬미 역시, 인간을 뛰어넘은 채로도, 인간 안에 머무른 채로도 아닌, 단일성의, 하나로 보려는 인식Einsicht의 경계에, 출구에 서서 행하는 것이기에 오직 문학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제1비가」 중에서

원문 :

Wer, wenn ich schriee, hörte mich denn aus der Engel

Ordnungen ? und gesetzt selbst, es nähme

einer mich plötzlich ans Herz: ich verginge von seinem

stärkeren Dasein. Denn das Schöne ist nichts

als des Schrecklichen Anfang, den wir noch grade ertragen,

und wir bewundern es so, weil es gelassen verschmäht,

uns zu zerstören. Ein jeder Engel ist schrecklich.

 

손재준 역 :

내가 소리쳐 부른들, 천사의 서열에서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들어 주랴? 설혹 어느 천사 하나 있어

나를 불현듯 안아 준다 하여도 나는 그의 보다 강력ㄷ한

존재에 소멸하리라,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아직은 견뎌 내는 두려움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우리가 그처럼 찬탄하는 것도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일 따위는 멸시하는 까닭이다. 모든 천사는 두렵다.

 

최성웅 역 :

누구냐, 나 울부짖은들, 천사의 대열에서 그 누가

내 울음에 귀 기울여준단 말이냐? 심지어 그중 한 천사가

순간 나를 가슴에 품더라도, 보다 강한 존재로 인하여

나 사라질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내는

저 끔찍한 것의 시작일 따름이기에.

놀라운 점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데 있어

냉담하다는 것이다.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

 

코멘트 :

상기하였듯 천사를 대하는 시적화자의 태도는 「제1비가」와 「제10비가」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하기에 제1비가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단어 ‘Wer,/영어 who에 해당하는 의문부사이다의 번역 역시 중요하다. 아직 개별자적 한계에 머무는 시적 화자 앞에, 그 존재를 넘어서는 천사의 등장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는 단순하며 즉각적고 생리적인, 단말마의 비명을 자아낸다. Wer라는 한 음절의 단어는 따라서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를 접하고 지르는 비명이 되어야 한다. 기존 한국어 번역에서 이를 인식하고 문장 첫머리에 비명으로 남기려 한 것은 최성웅 번역 외에 이정순 역(뉘라서,)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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