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통신 '저편으로부터' 제8회 시작에 앞서, '옮김과 들임'에서 주최하는 무료 독일어・희랍어 수업에 대해 알립니다.
다가오는 10월부터 독일어와 고전 그리스어 문법을 개괄하기 위한 수업을 진행합니다.
독일어 수업은 저 최성웅이, 희랍어 수업은 제 친구이자 희랍어 선생 이호섭이 담당합니다. 별도의 수업료는 없습니다. 다만 후원금을 통해 운영되는 만큼, 여유가 있으시다면 모임의 지속 및 차후 강의 등의 활동을 위해서 힘을 보태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수업을 신청하고 싶으시거나 '옮김과 들임'의 활동에 관심 있으신 분은 홈페이지(monvasistas.com)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릴케의 『두이노 비가』 정독 모임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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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으로부터' 제8회 — 이쪽에 묶여 저쪽을 부르짖기
有人在此岸身被重繫,空喚彼岸言:『來渡我去。』
- 『불설장아함경』 16권 중에서
요 며칠 피안彼岸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피안화彼岸花를 찾아 쏘다녔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한국의 '백중절'이나 멕시코의 '망자亡者의 날el día de los muertos'처럼, 일본에는 오히간お彼岸이있습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과 추분 각각 일주일 동안이 이에 해당되며, 봄의 오히간에는 보타모찌를, 가을 오히간에는 오하기를 먹습니다.
보타모찌牡丹餅와 오하기お萩는 멥쌀과 찹쌀을 섞어 찐 것을 팥앙금에 묻힌 떡으로, 계절에 따라 달리 부를 뿐 실상 같은 음식입니다. 씹히는 쌀이 제맛인 떡에 팥앙금 대신 흑임자나 콩가루 등을 묻혀 팔기도 하는데, 봄과 가을에 각각 피어나는 모란牡丹과 싸리萩 꽃을 팥 알갱이에 비유해 보통은 팥떡을 떠올립니다.
오히간お彼岸은 피안彼岸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불교의 영향으로 헤이안 시대부터 계속된 명절입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 춘추분에 이승此岸과 저승彼岸의 거리도 가장 짧아진다고 생각하 조상을 기리는 날로 삼았다 합니다.
일본에 온 지 4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크게 신경쓰지 않은 날이었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한 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절의 묘지를 관리하시는 분이 올 해는 늦더위로 아직 히간바나가 피지 않은 것 같다고, 그래도 근처 야나카 공동묘지에 가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야나카 공동묘지는 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커다란 공동묘지로 도쿄3대 묘지로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묘지를 좋아해서 이런 저런 나라에서 묘지를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혐오시설이라며 죽음도 주검도 몰아낸 도시에서 자라났기에 더욱 불안에 시달렸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지척에 죽음을 두고, 받아들이고, 향을 피우고, 생각하고, 그 죽음을 삶에서 영위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요? 이곳과 저곳을 나누지 말고 그저 삶에서 죽음을, 죽음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째서 나는 이곳에 묶여 저쪽을 부르짖고 있는지, 어째서 그럼에도 피안화는 보이지 않는지... 별에별 잡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다다른 야나카 공동묘지에서는 고양이들을 만났습니다. 고양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늘어지거나 조금은 여름에 눌린 듯한 걸음으로 그럼에도 종종, 끊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을 감인堪忍하고 있었습니다.
피안화는 찾을 수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 허기를 달래려 떡집에 들어가 맛 별로 피안의 떡 오하기를 하나씩 총 다섯 개를 샀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피안화 이야기를 꺼냈더니 가게 바로 옆 작은 공원에 해마다 몇 송이의 피안화가 꽃을 티우는데 올해는 더워서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화단 한 켠에는 올곧이 뻗어나오는 줄기들이 있었습니다. 온종일 찾아다녀도 보이지 보이지 않고, 마음 속에서만 불어나는 신기루 같은 저편의 꽃이 이편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작게 내미는 빨간 잎에 처음으로 마음이 설레였습니다. 아직 피지 않은 예감이야 말로 제가 찾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의 아지트 부쟁고로 가서 오하기를 먹으며 줄곧 의문이었던 피안과 차안에 대해 알아보기를 시작했습니다.
거진 10시간이 넘게 걸려 알아보았지만 어떤 언어로도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언어로 위키페디아 등을 뒤져 보니 저쪽 언덕을 뜻하는 피안彼岸이라는 단어는 도피안至彼岸에서 유래한 것으로, 바라밀波羅蜜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명 뿐이었습니다.
바라밀(婆羅蜜) 또는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어 빠라미따(पारमिता pāramitā)를 음역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티베트 불교에서의 해석 방식에 의하면 '너머pāra'를 목적어로 삼는 대격 'pāram'에, 가다를 의미하는 '√i'가 붙고, 마지막으로 접미사 'tā'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즉 미혹의 '이쪽 언덕此岸'에서부터 깨달음의 '저쪽 언덕彼岸'으로의 이행을 뜻한다 합니다.
다만 피안이라는 말이 범용적으로 쓰여지는 것은 알겠는데 그럼 정확히 어느 문맥에서 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를 피안으로 번역하게 되었는지, 이러한 번역의 시작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피안의 대립어로서의 차안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주어진 정보들 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찾아보니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은 600권에 달하는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산스크리트어: प्रज्ञापारमिता सूत्र prajñāpāramitā sūtra)의 음역으로, 이 중 앞 부분은 최초의 현장법사인 구마라집이 한역하여 한국에서는 흔히 『금강경』으로 불리우고, 뒷부분 내용은 현장법사가 260자로 간추려 『반야심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반야심경에는 '바라밀다'라는 역어는 보여도 '피안'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야경 전체 번역에 해당하는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구마라집 역, 404년)과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현장 역, 663년) 을 뒤져보았는데, 비슷한 대목으로 보이는 곳을 둘 다 '피안'으로 옮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菩薩摩訶薩欲到有爲、無爲法彼岸,當學般若波羅蜜。菩薩摩訶薩欲知過去未來現在諸法如、法相、無生際者,當學般若波羅蜜。
"보살마하살이 유위ㆍ무위의 법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김형준 중역)
『마하반야바라밀경』 1권(ABC, K0003 v5, p.229c02-c05)
若菩薩摩訶薩欲於一切法度至彼岸者,當學般若波羅蜜多。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에서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하면 의당 반야바라밀다를 배워야 하옵니다.(송성수 중역)
『대반야바라밀다경』 10권(ABC, K0001 v1, p.82c22-c23)
결국 한역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저 언덕에 이르는 행위(至彼岸)는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을 배움이기에 이 둘이 결과적으로 동의어임은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의문은 더해만 갔는데, 오래된 경전이니 만큼 반야경의 원문의 진위에 불분명한 점이 있기도 하고, 예의 문장에서는 피안과의 대립으로 차안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부처가 설법한 언어가 산스크리트어 혹은 팔리어, 아니면 그 둘 사이 어느 언어 쯤인 것 같은데, 산스크리트어로는 '너머로 간다pāramitā'는 서술어가 '피안'이라는 명사로 자리잡으며 종래에 없던 개념이 만들어 질 수 있었는지, 그 시작은 누구였는지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한역에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함께 쓰인 문장을 찾고자 하였고, 그 결과 축불념(竺佛念)과 불타야사(佛陀耶舍)가 413년에 공역한 『불설장아함경』 에 이르렀습니다 :
於我賢聖法中,爲著、爲縛,爲是鉤鎖。彼三明婆羅門爲五欲所染,愛著堅固,不見過失,不知出要,彼爲五欲之所繫縛。正使奉事日月水火,唱言:‘扶接我去生梵天者。’無有是處。譬如阿夷羅河,其水平岸,烏鳥得飮,有人在此岸身被重繫,空喚彼岸言:‘來渡我去。’
우리 현성의 법 가운데에서는 그것을 집착이라 하고 결박이라 하며 갈고리와 쇠사슬이라고 한다. 저 3명 바라문들은 다섯 가지 욕망에 물들고 애착이 굳어져서 그 허물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그는 다섯 가지 욕망에 묶여 있다. 그들은 해와 달과 물과 불을 섬기며 ‘저를 인도하여 범천에 태어나게 하십시오’라고 외치지만 그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아이라하(阿夷羅河)의 물이 기슭까지 가득 차 까마귀나 새들도 그 물을 먹을 수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이쪽 기슭에 몸이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 부질없이 저쪽 기슭을 향해 와서 ‘나를 그쪽 기슭으로 건네주시오’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불설장아함경』 16권(ABC, K0647 v17, p.961b13-b20)
『불설장아함경』 에서는 위와 같이 차안과 피안이 개념적으로 명백히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404년에 구마라집이 번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보다 늦게 번역되었지만, 불타야사가 구마라집의 스승이었다는 점과, 구마라집의 초청으로 축불념과 함께 장안에 와서 『불설장아함경』 을 번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피안'과 '차안'이라는 번역어와 그 개념의 성립은 이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차안에 앞서 피안은 최초의 불경 번역자 중 하나로 알려진 안세고(安世高)가 148년에서 170년 사이에 한역한 『불설아난문사불길흉경』에도 이미 나와 있기에, 이러한 개념의 정립은 어쩌면 불법이 중국에 퍼졌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안과 피안의 대립은 『불설장아함경』 의 원문에 해당하는 문장을 참조할 경우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
Then along comes a person who wants to cross over to the far shore.
But while still on the near shore, their arms are tied tightly behind their back with a strong chain.(Bhikkhu Sujato 역, 2018년)
Atha puriso āgaccheyya pāratthiko pāragavesī pāragāmī pāraṁ taritukāmo.
So orime tīre daḷhāya anduyā pacchābāhaṁ gāḷhabandhanaṁ baddho.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따라서 불타야사와 축불념은 원문의 orima(nearest, nearer; on this side)와 pārima(yonder; farther)를 대립관계로 파악하고서, 이 둘을 차안과 피안으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한문에서 불교용어는 원어라 볼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에는 없는 지시사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고, 그를 통해 보다 명료한 개념적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다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지시사에 대한 이해는 생각만큼 쉽지가 않기에, 고전을 다룰 때에는 보다 섬세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실제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는 지시사가 별도로 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3인칭대명사 tad를 변형하여 사용하기에 문맥에 따라 프랑스어의 지시사 'ce'와 마찬가지로 '이', '그', '저'로 모두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차안과 피안이라는 용어는 불경의 세계를 한문으로 담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개념 명사라 할 수 있을 테고, 실제 다른 문장이나 단어들을 이 두 단어로 통일해서 번역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If you practice in accordance
with each of these questions
as taught by the Buddha,
you’ll go from the near shore to the far.(Bhikkhu Sujato역, 2018년)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는
눈 뜬 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 이를 것이다.(법정 역, 1991년)
위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말씀에 가장 가까운 자료로 손꼽히는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서도 제일 먼저 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피안도품」의 일부입니다. 아함경 위주로 받아들였던 한국 불교에서는 무소유로도 유명하였던 법정 스님의 번역으로 1991년에 처음 그 면모가 알려졌다고 합니다. 법정 스님의 번역은 일본어의 중역인데, 일본은 1927년부터 1984년까지 다섯 개의 번역 판본이 있었고, 그 중 어떤 번역을 참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앞서 orima와 pārima의 경우와는 조금 달리, 위에서는 너머를 뜻하는 pāra와 에 부정접미사a를 더한 apārā를 각각 피안과 차안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에서 이此와 저彼는 화자의 인식 안에서의 상대적 거리를 가리키는 지시사가 아닌, 인식의 안과 그 너머를 가리키는 절대 지시사로 기능하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 되는 '어차피於此彼'라는 단어에서의 '이렇든 저렇든'은 동일한 위계 속에서의 이곳과 저곳을 가리키지만, 불교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은 그러한 대립을 넘어섭니다. 즉 차안이라 일컬어지는 이승이요, 사바세계娑婆世界요, 감인토堪忍土에서부터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거센 흐름인 폭류暴流를 건너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피안일 테지요.
하지만 한문은 물론이고 한국어에서도 이此와 저彼는 혼용되어 사용될 뿐만아니라, 다른 언어와 문화들이 뒤섞이면서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에서 지시사들의 혼잡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예로는 제가 오래 작업중인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불교적 영향으로 작가가 『만다라』라는 제목도 염두하였던 『팔방치기』의 주인공은 아르헨티나 출신 올리베이라 오라시오로,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집니다. 제1부이자 보내드리는 문학통신의 제목이기도한 '저편으로부터'는 이방인인 주인공이 배회하는 파리가 배경이며, 제2부 '이편으로부터'는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제3부 '다른 편들로부터'에는 공상과 관념이 난무합니다.
이 소제목들의 영·독·불역을 보면 재밌습니다. 영어에서는 this와 that혹은 here와 there의 대립을 버리고 부러 the other side와 this side로 1부와 2부를 옮겼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차안과 피안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this shore'과 'the other shore'를 겨냥한 해석이며, 독일어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언덕UFER'이라는 단어까지 집어넣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기대고 있는 지시사 이/그/저의 불안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문맥에 따라 같은 단어여도 다르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심지어 불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법정 역, 1991년)
솟아난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마치 퍼진 뱀독을 약으로 다스림 같아라.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김출곤 역, 2016년)
뱀의 독이 퍼지는 것을 다스리듯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제압하는 사람은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석지현 역, 2016년)
〔全身に〕広がった蛇の毒を薬で制するように、こみ上げてくる怒りを制する比丘は、この世(俗世)を捨て去る。あたかも、蛇が、それまでの古くなった皮を捨て去るように。
온몸에 퍼진 뱀의 독을 약으로 다스리듯, 솟구치는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이 세상(속세)를 벗어버린다. 마치, 뱀이, 그간의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고시마 키요타카五島清隆 역, 2013년)
orapāraṃ이라는 단어는 앞서 불타야사와 축불념 차안과 피안으로 번역한 orima와 pārima가 합성된 것지만 역자들은 모두 차안과 피안을 피해 다른 단어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법정과 석지현의 경우 뜻은 한자와 같아 보일지언정 부러 '이 세상도 저세상도'와 '이 언덕과 저 언덕'라며 풀어 옮겼으며, 김출곤과 고시마 키요타카는 의식적으로 차안과 피안을 떠올릴 단어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해 김출곤과 고시마 키요타카는 각각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
김출곤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긴 “orapāraṃ”은 숫타니파타의 이 경에만 보인다. “oraṃ(아래, 아래로)”과 “pāraṃ(너머, 너머로)”이라는 두 부사가 결합된 낱말이다. 흔히 “이 세상 저 세상”으로 옮기고 있으나 이는 뚜렷한 경증이 없는 해석이다. “전후상前後想”처럼 심계발과 관련한 표현일 수도 있기에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겼다.
고시마 키요타카
orapāraについては、「劣った・卑近な(ora,Skt.avara)岸(pāra)」と解する他に、「此岸(ora)と彼岸(pāra)」と解して「この世とかの世」の意とする説がある。「此岸」に対する「彼岸(pāra)」はふつう「涅槃、悟りの境地」を指すが、「捨て去る」対象には合わないので、この場合、「この世とかの世」を「人間界と天人界」あるいは「欲界と色界」などと解釈するほかない。つまり、「様々な生存形態をとって流転し続ける輪廻的状態」を指すとするのである。しかし、いずれの解釈でもorapāraが「涅槃・悟りの境地」に対比される「この世・俗世・輪廻の世界」を指していることに違いはない。
(orapāra에 대해서는 '열등하고 비천한(ora, Skt.avara)의 기슭(pāra)'으로 해석하는 것 외에 '차안(ora)과 피안(pāra)'으로 해석하여 '이승과 저승'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 “피안에 해당하는 pāra 보통 '열반,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키는데, 이는 '버리는' 대상에 부합하지 않기에 그럴 경우에는 '이승과 저승'을 '인간계와 천인계' 혹은 '욕계와 색계' 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즉, '다양한 생존형태를 취하며 계속 윤회하는 윤회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든 orapāra가 '열반, 깨달음의 경지'와 대비되는 '세속, 속세, 윤회의 세계'를 가리킨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즉 같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불경이라 할지라도, 경전에 따라 문맥에 따라 지시 대상들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 텐데, 이는 절대적으로 해석의 주체인 번역자가 불법을 어느 정도로 깊이 이해하느냐에 달린 일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법도 산스크리트어도 팔리어도 전혀 모르는 저에게 「뱀의 경」은 유독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찾으려던 피안도 피안의 꽃도 사실은 이쪽에 묶여 너머를 보지 못하는 사람의 집착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이쪽도 저쪽도 어차어피於此於彼 모두 버리고, 나아가 너머에 대한 생각마저 버려야 조금이라도 감지될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피안도 차안도 모두 잊어야 할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간의 심신 고통스러운 생각을 감인하고 나자 추분이 지나갔고,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오늘 다시 공원에 가 보니 피어나지 않을 것 같던 피안화도 결국엔 꽃을 피어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이 왜인지 아쉬워 돌아돌아 처음 들어선 길에서 마냥 아름다운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동네 할머니를 한 분 알게 되었는데, 할머니의 집은 여러 꽃과 식물들로 가득했고, 한 쪽 문에는 칠판을 달아 매 달 새로 꽃 그림을 그리신다고 하십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피안의 꽃이 그 어떤 실물보다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것이 형언하기 힘든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피안화는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또는 '대홍연화大紅蓮華'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mahā-mañjūṣak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입니다. 마하만주사화는 천상에 핀다는 붉은 빛의 커다란 연꽃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하는데, 할머니의 한 점 그림이 제게는 바로 이 꽃이었나 봅니다.
비로소 가을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