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 저편으로부터 ›는 제가 태어난 한국의 바깥 편에서, 혹은 제게 모국어로 주어진 한국어의 바깥 편에서 생활하고 경험하는 것들을 비정기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글입니다.

때로는 제가 번역한 한 편의 시를 별 다른 소개 없이 전달할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곳을 떠돌며 만난 사람들이나 풍경들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이른바 잡문이니 읽고 싶은 만큼 읽고 넘기면 되겠습니다.

현재 도쿄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고 번역을 하고 있는데, 번역은 돈이 안 되는 데다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계속 언어 수업을 하고 있어 정기적으로 보내지는 못하니 이점 혜량 바랍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시작반을 개강합니다. 단체 수업으로 4회 기준 10만원 내외이니 관심있는 분은 연락바랍니다.
독어1팀 : 화21-23(12월5일시작), 독어2팀 : 일14-16(11월26일시작)
불어2팀 : 토9-11시(12월23일시작), 불어3팀 : 수20-22(12월6일시작)

또한 외국어로 문학작품 읽기 모임(수요일 22-24시)도 무료로 진행하고 있으니 참가 희망하시는 분 환영합니다.

‹ 저편으로부터 › 구독신청(다른 분께 추천 시) : https://forms.gle/286TStSvpqtjGUHa6
sns 링크 : https://linktr.ee/monvasistas

——————



안녕하세요, 최성웅입니다.
문학통신 ‹ 저편으로부터 ›의 첫 글을 보내드립니다.

우선 처음이니 만큼 ‹ 저편으로부터 ›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번역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

‹ 저편으로부터 ›는 제가 4년 넘게 번역 중인 아르헨티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의 제1부 제목입니다. 코르타사르는 제가 에콰도르에 살 때 문학을 하던 친구에게 처음 들어 알게 된 작가로, 이후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읽고 번역하기로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

코르타사르가 누구인지 모르실 분이 많을 텐데요, 그는 세계문학을 통틀어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선 꽤나 인기를 얻은 로베르트 볼라뇨도 스페인어권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세르반테스, 보르헤스, 코르타사르를 꼽은 바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왕성하게 번역되는 작가이지만 한국에서는 눈 밝은 이가 적은 탓인지 아직 단편 선집 한 권 정도만 나왔을 뿐입니다. 특히나 코르타사르를 코르타사르이게끔 해주는 그의 대표작 『팔방치기』는 이제서야 제가 번역해서, 아마 책으로 나오기까지 1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코르타사르는 1914년 불어권인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고,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를 거쳐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고, 네 살 때 조국인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에 살며 병약했던 어린 시절, 집 바깥에서는 스페인어로 생활했지만 집 안에 돌아오면 프랑스 사전을 탐독하고, 쥘 베른을, 빅토르 위고를, 에드거 앨런 포를 읽었습니다.

1951년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에 대한 반대 표명으로 교직을 관두고 파리로 이주를 했고, 프랑스에서는 유네스코 공식 번역가로 영어 및 프랑스어 문서들을 번역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1963년, 49세에 출간한 『팔방치기』는 라틴 아메리카 붐을 주도하는 작품으로서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팔방치기』는 여러 의미로 복잡한, 아니 혼잡한 작품인데, 이것은 위에 말씀드린 것 같이 문학과 언어에 대한 작가의 편력에서 기인합니다.

제1부 ‹ 저편으로부터 ›의 배경은 파리고, 제2부 ‹ 이편으로부터 ›는 남미의 파리라 불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배경이 되어 일종의 데칼코마니를 이룹니다. 그리고 제3부 ‹ 다른 편들로부터 ›는 어느 곳에서 속하지 않는 공상의 공간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품에서는 장소만이 아니라 언어도 뒤섞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스페인어로 쓰여졌지만, 특히 제1부 파리에서는 작중 인물들이 구사하는 프랑스어가 아무런 주석도 없이 나오며, 그 외에도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희랍어마저도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스페인어라고 말했지만, 코르타사르가 구사하는 스페인어는 어디까지나 아르헨티나어입니다. 아르헨티나어는 스페인어 외에도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스페인어를 쓰는 국가 중에 어휘나 음악성에 있어 가장 독특합니다. 

작가 스스로도 번역을 할 때에는 공식적인 스페인어로 번역하지만, 자신의 글을 쓸 때에는 아르헨티나어로 쓴다고 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아르헨티나어에서 기인하는, 그리고 저 자신의 독특한 언어 학습으로부터 기인하는 혼잡성은 쉽게 언어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문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재즈가 작품 전체를 관통합니다. ‘재즈란 좋거나 나쁜 것, hot하거나 cool한 것, 희거나 검은 것, 고전적이거나 현대적인 것, 시카고나 뉴올리언스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그러한 재즈는 파리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처럼, 프랑스어와 아르헨티나어처럼, 책의 독자에게 ‘정반합의 구타’를 흠씬 선사합니다.

이러한 혼잡과 더불어 작가는 물리적으로는 한 권일 뿐일 책을 여러 권의 책으로 존재하게 만듭니다. 서문에서 작가는 책의 사용법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 이 책은 각자의 방식에 따라 복수複數의 책으로, 특히 두 권의 책으로 성립 가능하다. 독자에게는 다음 두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 읽기를 권한다 :
제1의 책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읽어나가며, 결말이라는 단어와 등가인 별 세 개가 찬란히 발치를 비추는 56장에서 끝이 난다.
제2의 책은 73장에서 시작하고 각 장 발치에 적힌 순서를 따라 읽는다.»

총 3부 155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저는 4년 전부터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일본어로 읽으며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즐겁게도, 이 책의 번역들은 상당히 훌륭한 수준입니다.

 



영어 번역가는 작가의 친구이자,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들어 준 그레고리 라바사입니다. 그의 번역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현재 나온 일본어 번역은 영역을 중역해서 오래전에 나왔습니다. (현재는 제가 참가하는 보르헤스 연구회에 나오는 메이지 대학의 우치다 선생님께서 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불어 번역은 상대적으로 세밀하지는 못하지만 문학적인 문체로 프랑스어권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으며, 독어 번역은 가장 정밀함을 자랑합니다.

벌써 1년 넘게 매주 수요일 저녁 수요윤독회에서 해당 작품을 다른 분들과 읽고 있습니다. 원어인 스페인어가 됐든, 번역어인 불어/독어/영어/일어가 됐든, 작품을 이해하고 싶은 분들고 함께 더듬어 나가며 작품에 대한 번역도 점점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번역하면 총 600페이지는 거뜬히 넘을 상당히 두꺼운 책으로 현재는 절반 이상 작업이 끝났고, 내년 말까지는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꾸준히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 저편으로부터 › ‹ 이편 ›에 있는 친구들에게 제가 읽고 경험한 것들이 조금은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2.
여기서부터는 『팔방치기』의 번역에 관련한 이야기이니, 번역 및 출판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넘기셔도 될 듯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22일)부터 수요윤독회가 다시 시작하는데, 이전 윤독회에서는 상기한 ’제1의 책’을 읽기 위해, 1장부터 56장까지(1-2부)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제2의 책’으로서 작품을 함께 읽어나가기로 해서, ’제2의 책’의 처음인 73장 번역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매주 참가자 중 한 분이 자신이 가능한 언어로 2페이지 정도 번역을 하면,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불행히도 다행히도 너무도 코르타사르적인, 너무도 재즈적인 문장으로 시작해 번역에 참가한 분도 상당히 난감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번역에 참가한 분은 대학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또 부업으로 출판 편집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언어에 익숙하고, 또 편집자이니만큼 번역문을 다루는 데에도 민감한 분입니다.

그런데도 실제 직접 번역을 할 경우 생기는 문제들이 참가자 분의 번역에서 또렷이 드러나기에 이를 두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물론 이 분의 경우는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고 학습을 위한 번역이니 이 점은 감안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참가자 분과 제가 한 번역, 그리고 원문과 다른 번역문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한국어 번역a
그렇다, 하지만 해질녘, 무너져 보이는 현관으로부터, 작은 출입구에서 나와 유쉐뜨 가로 질주하는 어둡고 고요한 불빛과, 돌을 데워 문간 공간에서 매복하고 있는 정체 없는 우리의 불빛을 누가 달래 줄 것인가? 시간이나 추억, 우리를 이쪽으로 속박하는 끈끈한 것과 연계되어, 우리의 내부에 지속적으로 둥지를 트고, 우리가 재가 될 때까지 감미롭게 타오를 이 달짝지근한 연소를 어떻게 정화하면 될 것인가?

한국어 번역b
그렇다, 하지만 대관절 그 누가 우리를 치료할 수 있어 귀 먹은 불로부터, 좀 먹은 현관과 좁다란 마당을 뛰쳐나와 해질녘 위셰트 가街를 내지르는 무색의 불로부터, 돌들을 할짝대거나 문짝의 공허에 도사리는 무상無像의 불로부터 벗어나게 한단 말인가, 우리 어떻게 해야 감미로운 연소로부터 몸을 씻어 이것의 추격을, 둥지를 틀고 계속해서 시간과 기억 및  끈덕지게 우리를 이편에 붙들어매는 뭇 실질과의 연맹을, 그리고 달콤한 불에 타 종국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리고야 마는 결말을, 뿌리칠 수 있단 말인가. 

원문
Sí, pero quién nos curará del fuego sordo, del fuego sin color que corre al anochecer por la rue de la Huchette, saliendo de los portales carcomidos, de los parvos zaguanes, del fuego sin imagen que lame las piedras y acecha en los vanos de las puertas, cómo haremos para lavarnos de su quemadura dulce que prosigue, que se aposenta para durar aliada al tiempo y al recuerdo, a las sustancias pegajosas que nos retienen de este lado, y que nos arderá dulcemente hasta calcinarnos.

영어 번역
YES, but who will cure us of the dull fire, the colorless fire that at nightfall runs along the Rue de la Huchette, emerging from the crumbling doorways, from the little entranceways, of the image-less fire that licks the stones and lies in wait in doorways, how shall we cleanse ourselves of the sweet burning that comes after, that nests in us forever allied with time and memory, with sticky things that hold us here on this side, and which will burn sweetly in us until we have been left in ashes.

독일어 번역
Ja, aber wer wird uns heilen von dem tauben Feuer, dem Feuer ohne Farbe, das durch die Rue de la Hechtete läuft, wenn es Nacht wird, aus morschen Portalen Schlägt, aus den kleinen Innenhöfen hervorkommt, von dem bildlosen Feuer, das über Steine leckt und auf den Türschwellen lauert, was sollen wir tun, um sein sanftes Brennen abzuwaschen, das uns verfolgt, das sich festsetzt, um zu dauern, verbündet mit der Zeit und der Erinnerung, den haftenden Substanzen, die uns auf dieser Seite festhalten, von diesem sanften Brennen, das anhalten wird, bis es uns ausgeglüht hat.

프랑스어 번역
Oui, mais qui nous guérira du feu caché, du feu sans couleur qui, à la nuit tombante, court dans la rue de la Huchette, sort des portails vermoulus, des étroits couloirs, du feu implacable qui lèche les pierres et guette sur le pas des portes, comment ferons-nous pour nous laver de sa brûlure douce qui se prolonge, qui s’installe pour durer, alliée du temps et du souvenir, des substances poisseuses qui nous retirent de ce côté-ci, et qui lentement nous consumera jusqu’à nous calciner ?

일본어 번역
そうだ、しかし誰がぼくらの音たてぬ火を癒してくれるだろうか、夕暮に、崩れかけた表玄関から、小さな出入口から出て、ユシェット通りを突っ走る色のない火、石を舐め、戸口の空間に待ち伏せている姿なき火を。いつまでも続く快美な燃焼をどのように浄化したらいいのか、時問や思い出と結託し、われわれをこちら側にとどめさせるべとべとしたものと結託して、われわれの内部に居座りつづけ、われわれを灰になるまで甘美にも焼きつくすこの快美な燃焼を?


상당히 길지만 단 하나의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요? 여기에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만, 다만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인지, 그 문체란 어떠한 것인지, 그것을 어떤 독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하는지에 따라 전략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선 같은 인도유럽어권인 불어, 독어, 영어의 경우는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처리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영어의 중역인 일본어의 경우는 두 문장으로 처리했고, 한국어a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장이 2개의 의문부사quién(who)과 cómo(how)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으니, 크게는 두 문장으로 나열로 볼 수 있고, 문장이 너무 길어지면 감당하기 힘들어서 일본어와 한국어a에서는 두 문장으로 나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작품에 대해서 설명했던 것처럼, 작품의 문체에는 술과 재즈에 취해, 온갖 언어와 문법이 섞여들면서도 좀 체 버릴 수 없는 이성이 번득이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복잡한 문장을 여러 개의 단문장으로 나눌 수 있지만, 코르타사르의 문체 혹은 문학성을 생각했을 때에는 조금 미묘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마냥 문장을 똑같이 한 문장으로 만들려다 보면 한국어와 근본적으로 다른 통사적 특징 때문에 이른바 ’과호흡’이 오게 됩니다. 

유럽어에서는 주어 + 동사 + 목적어 순으로 문장을 던지기 쉬운 반면, 한국어는 주어 + 목적어 + 동사 순이 이해하기가 편하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럽어에 경우 어떤 동작이 있을 지를 명확히 말한 다음, 그 동작에 걸리는 목적어를 상당히 길게 펼치는데, 이를 일반적인 한국어 순으로 옮기면 앞에 나열하는 것들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른 채로 읽게 되어 점점 숨이 막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문장 전반부의 통사를 파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Sí, pero quién(주어) nos(직목) curará(동사) del fuego sordo(간목1), del fuego sin color que corre al anochecer por la rue de la Huchette, saliendo de los portales carcomidos, de los parvos zaguanes(간목2), del fuego sin imagen que lame las piedras y acecha en los vanos de las puertas(간목3),

이에 대한 한국어번역a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렇다, 하지만 해질녘, 무너져 보이는 현관으로부터, 작은 출입구에서 나와 유쉐뜨 가로 질주하는 어둡고 고요한 불빛과(간목1+2), 돌을 데워 문간 공간에서 매복하고 있는 정체 없는(간목3) 우리(직목)의 불빛을 누가(주어) 달래 줄(동사) 것인가?

여기서 참가자의 번역은 너무 길어지는 목적어가 버거웠는지 목적어들을 압축(?)시킵니다. 그 결과 무언가 문학적이지만, 작가가 문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섬세한 것들이 지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의 번역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
그렇다, 하지만 대관절 그 누가(주어) 우리를(직목) 치료할 수 있어(동사1) 귀 먹은 불로부터(간목1), 좀 먹은 현관과 좁다란 마당을 뛰쳐나와 해질녘 위셰트 가街를 내지르는 무색의 불로부터(간목2), 돌들을 할짝대거나 문짝의 공허에 도사리는 무상無像의 불로부터(간목3) 벗어나게 한단 말인가(동사2)

여기에는 몇 가지 궁리가 있습니다. 
1. 우선 원문의 순서를 전달하기 위해 동사를 둘로 쪼갰습니다. ’누구를 병으로부터 치료하다curar’라는 동사를 ’치료’하여 그 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다’로 나누어 줌으로써 기다란 목적어로 인해 숨이 막히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2. 문장의 구조를 이해하기 쉽게 ’대관절’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의문문임을 드러냈고, 간접목적어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소리로서도 명확하게 파악하게 전부 -부터로 처리했습니다.
3. ’좁다란 마당을 뛰쳐나와’ 부분도 ’마당으로부터’로 쓰면 간접목적어와 혼동할 수 있기에 부러 다른 조사를 활용했습니다.
4. sin imagen부분은 이미지, 혹은 상像이 없다는 말인데, 이 부분을 참가자 분은 ’정체 없는’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작품 전체에서 영상imagen과  형상figura의 대립이 중요시 되기에, 해당 부분을 의역하지 않고, 또 문장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으면서도 음악성을 살리기 위해 무색(sin color)과 함께 읽을 수 있게 무상無像이라고 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고 한자를 병기했습니다.

문장의 후반부는 좀 더 복잡한 공정들이 들어가 있어 설명이 더욱 난해해 질 것 같아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결국 이 한 문장을 문학적으로 번역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제 경우는 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여러 통번역을 해 왔지만, 결국 취향과 가치관 탓에 결국 저는 가장 돈이 안 되고 가장 어려운 작품들만을 골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몇 해 전부터 제가 행하는 번역은 그저 제 돈과 시간을 들여서 하는 취미 활동일 뿐이라고 마음먹기로 했습니다. 이후로 번역할 작품은 시간이 적게 드는 간단한 작품이 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하였고, 생계는 언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취미 활동이면 좀 더 건강했으면 좋겠지만, 잘못 타고나서 그런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취미 활동이란 게 있다는 것이 어찌보면 즐거운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참고로 코르타사르는 1984년에 죽었고, 전 198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문체는 제가 지금껏 작업한 어떠한 작가보다도 여러 모로 저와 일치하기도 해서, 멋대로 제가 코르타사르의 환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 저편으로부터 › 제1회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엔 좀 더 가벼운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를 읽는 수요윤독회에 참가하시고 싶으신 분들은 언제든 연락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vasist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