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통신은 어쩌다 보니 6회에 연달아 곧장 보냅니다.
7회는 기존에 번역한 『두이노 비가』의 재출간을 위해, 편집부를 설득하고자 쓴 글입니다. 제 작업을 보아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는 제 번역이나 입장을 드러내는 글을 평소 쓰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독자라면 오직 자신의 눈으로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제 번역을 표절해도 어설픈 비평을 해도 개의치 않으며, 제 번역을 주장하는 글이라면 지금껏 일본에서 쓴 『테스트 씨』의 석사논문이 다입니다. 이번 글도 단지 출판사를 설득하기 위한 용도로 대충 쓴 잡문입니다. 다만 저를 응원해주시는 몇 안되는 분들도 어째서 제가 모든 작업 중에 『두이노 비가』를 중히 여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기에, 기왕 쓴 글을 통해 그런 의문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길 바랍니다.
다른 판본이 아닌 손재준 역과 비교한 것은 출판사 요청에 의한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두이노 비가』 번역 당시 스페인어, 프랑스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된 수십 편의 번역본들을 참고한 바, 개중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번역본이라면, 장-피에르 르페브르와 필립 자코테의 프랑스어본을 꼽겠습니다.
현재 제가 작업한 『두이노 비가』는 종이책이 절판되었으나, 헌책으로 시중에서 구할 수 있고, 또 전자책으로 구입 가능합니다. 언젠가 다시 종이책으로 선보일 수 있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 ——— ——— ——— ——— ——— ——— ——— ——— ——— ——— ——— ——— ——— ——— ———
비고 : 두 번역의 결정적 차이는 번역문이 독립적으로 시적 문체를 이루고 있는가이지만, 이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기에 원문에 대한 해석과 그 선택에 대해서만 말한다.
「제1비가」 중에서
원문 :
(…) Ist es nicht Zeit, daß wir liebend
uns vom Geliebten befrein und es bebend bestehn:
wie der Pfeil die Sehne besteht, um gesammelt im Absprung
mehr zu sein als er selbst. Denn Bleiben ist nirgends.
손재준 역 :
우리가 사랑하면서
연인으로부터 벗어나, 떨면서 참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마치 화살이 힘을 모아 날아가서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 떨면서
시위를 견뎌 내듯이. 참으로 머무름이란 어디에도 없다.
최성웅 역 :
(…) 이제는 우리가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어, 떨면서 견뎌낼 시간이 아니겠는가?
마치 시위를 견딘 화살이 집약된 힘으로 날아가 그 자신으로,
그 이상으로 존재하려는 듯이. 이제 그 어디에도 머무름이란 없기에.
코멘트 :
『두이노 비가』에서 말하는 사랑은, 마음의 위안이든 육체적 보상이든 간에 보답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특히 연인 간의 사랑이란 외사랑이 아니라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로부터도 사랑받기를 갈구한다. 위 시구에서는 이러한 사랑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선 어떠한 ‘비인간적’인 사랑을, 인간을 넘어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사랑을 하기 위한 방식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릴케는 통상적으로 쓰는 표현에 이른바 ‘낯설게 하기’ 효과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원문1,2행을 살펴보면 ‘liebend’와 ‘Geliebten’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는데, 각기 사랑하다라는 동사 ‘lieben’에서 파생된 현재분사와, 과거분사 ‘gelieb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Geliebte는 남성명사로 쓸 경우는 사랑받는 (남)자, 여성명사로는 사랑받는 여자로 통상 사용되기에 손재준은 이를 ‘연인’으로 옮겼다.(이러한 번역은 손재준 외 다른 모든 한국어 역자도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제1비가」에서 릴케가 기리는 사랑이란 가스파라 스탐파와 마찬가지로 ‘연인을 잃고’서도 여전히 ‘사랑하는’ 자이다. 이는 인간적인 사랑의 범주를 넘어선 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최성웅은 현재분사와 과거분사가 지닌 근본적인 의미, 즉 사랑의 능동과 수동을 드러내고자 각각을 ‘사랑함’와 ‘사랑받음’으로 번역했다.
또한 손재준은 한국어의 일반적 어순에 맞춰 2행과 3행과 4행의 순서를 뒤섞어 번역했다 :
마치 화살이(wie der Pfeil) 힘을 모아 날아가서(um gesammelt im Absprung-3행)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mehr zu sein als er selbst.-4행) 떨면서 (es bebend bestehn-2행) 시위를 견뎌 내듯이.
최성웅은 2,3,4행의 순서를 맞추어 번역했는데, 위 경우에는 그 차이가 본질적이다. 인간을 넘어선 사랑을 한다는 것, 이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초월 혹은 해탈이고, 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을 이름하는데, 릴케는 여기에서 신학과 철학이 아닌, 오직 문학으로만 가능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끊어내고 폭류를 건너기를, 부처가 되기를 가르치고, 철학에서도 이러한 초월 혹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육체에 감관(sens)를 지닌 존재로, 감각(sense)하고 의미(sense)지음으로써 하나의 방향(sense)을 지향하는 인간이 인간인 상태로 저 너머를 가기란 지난하다.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신학과 철학에서도 볼 수 있는 초월의 방식이다. 하지만 『두이노 비가』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몸뚱어리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그 존재를 버리지 않고 초월을 바라보는 방식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떨면서’, ‘견뎌’내는 것이고, 그래야 평소 존재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치 시위를 견딘 화살이 집약된 힘으로 날아가’, ‘그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이성이 아니라, 문체로서 감동시키는 방식으로서, 문학으로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순서를 그대로 재현할 필요가 있다.
「제7비가」 중에서
원문 :
Werbung nicht mehr, nicht Werbung, entwachsene Stimme,
sei deines Schreies Natur; zwar schrieest du rein wie der Vogel,
wenn ihn die Jahreszeit aufhebt, die steigende, beinah vergessend,
daß er ein kümmerndes Tier und nicht nur ein einzelnes Herz sei,
das sie ins Heitere wirft, in die innigen Himmel.
손재준 역 :
구애가 아니다, 더는 구애가 아니다,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
그것이 네 외침의 본성이게 하라. 너는 상승하는 계절이 높이 품어 주는 새처럼 순수하게 외치리라,
그때 계절은, 거의 잊고 있는 법이다,
새가 근심에 차 있는 한 마리 짐승이라는 것을, 그리고 청명한 대기 속으로,
그 지순의 하늘 속으로 계절이 던져 올리는 오직 유일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최성웅 역 :
구하지 마라, 구해서는 아니 된다. 터져 나오는 소리가
외침의 바탕이 되게 하라. 새의 비명같이 순수해야,
솟아오르는 계절에 드높아지는 새처럼, 한낱 마음이 아니라,
불안한 짐승임을 거의 잊고서, 명랑함 속으로,
내밀한 하늘 속으로 내던져진다.
코멘트 :
우선 손재준의 위 번역은 원작의 행들을 뒤섞어 놓았을 뿐 아니라 비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은 Werbung 번역에 대한 차이다.
Werbung은 동사 werben을 명사화한 것인데, werben은 무언가 대상을 얻고자 ‘애쓰거나’, ‘추구하려는’ 의지나 작위가 개입된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Werbung은 현대에 있어 ‘광고’라는 뜻으로 제일 많이 사용되며, 연애에 있어서는 ‘부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하지만 「제1비가」에서 살펴 보았듯이, 릴케는 이러한 통상적인 사랑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고, 오히려 그러한 작위 때문에 진정한 사랑의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적인 ‘의지’보다 시에서는 언제나 ‘새’, ‘사자’, ‘모기’ 등의 비인간적인 사물이 보다 순수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는 단순 연인간의 사랑에 한정되는 일이 아닐진대, 손재준 외 다른 번역가들도 모두 ‘구애’라고 번역하여 총 10편의 『두이노 비가』가 그리는 대장정을 좁은 세계에 한정시켰다.
「제10비가」에서
원문 :
Dass ich dereinst, an dem Ausgang der grimmigen Einsicht,
Jubel und Ruhm aufsinge zustimmenden Engeln.
손재준 역 :
나 언젠가 무서운 인식의 끝에 서서
화답하는 천사를 향해 환호와 찬미의 노래 크게 부르게 되기를.
최성웅 역 :
바라건대 나 언젠가, 하나로 보려는 가혹한 인식의 출구에 서서
화답하는 천사들에게 영예와 환희의 노래 올릴 수 있어라.
코멘트 :
「제1비가」에서부터 「제10비가」에 이르기까지 천사란 인간으로서 도무지 헤아릴 수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따라서 「제1비가」에서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라 부르짖으며, 그런 천사 중 하나가 ‘나를 가슴에 품더라도’, ‘보다 강한’ 천사라는 ‘존재로 인하여’ 나는 ‘사라’지고야 만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럼에도 이미 인간적 사랑의 한계를, 인간적으로 존재함에 한계를 깨달은 시인은 천사를 향하고 있으며, 「제10비가」는 그러한 대장정의 결말부에 해당한다. 나의 존재가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소리지르고, 상대를 ‘끔찍하다’고 여기던 시적화자는 비로소 인간의 개별자적 한계에 갇히지 않고서, ‘천사를 향해 환호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앞서 설명하였듯이 어디까지나 문학적이고, 그렇기에 『두이노 비가』가 근현대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행의 an dem Ausgang der grimmigen Einsicht 부분을 손재준은 ‘무서운 인식의 끝에 서서’라고, 최성웅은 ‘하나로 보려는 가혹한 인식의 출구에 서서’로 옮겼다.
즉 최성웅은 Einsicht, 영어로는 Insight에 해당하는 단어를 ‘하나로 보려는 인식’으로 옮겼는데, 이는 개별자로서의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나라는 자아이며 아집인 것에 심신이 사로잡혀 있고, 끊임없이 그러한 나를 다른 것과 동일시(identify)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를 지키고자 한다. 일본에서 처음 정립된 통찰Einsicht라는 단어는 이러한 개별자적 존재의 일관성을 긍정하는 단어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고, 손아귀로 쥐듯이 ‘파악’하려고, ‘인식’하려고 든다. 하지만 그렇게 그러모은 나라는 개별자는 ‘보다 강한 존재’인 천사 앞에서 흩어지고 사그러들 따름이기에, 「제1비가」에서는 무력히 절규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제1비가」에서부터 「제9비가」까지를 거치며 (실제 비가는 순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 마침내 「제10비가」에서 자기 존재를 파괴할, 나라는 아집을 끊어낼 천사를 보고 찬미할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찬미 역시, 인간을 뛰어넘은 채로도, 인간 안에 머무른 채로도 아닌, 단일성의, 하나로 보려는 인식Einsicht의 경계에, 출구에 서서 행하는 것이기에 오직 문학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제1비가」 중에서
원문 :
Wer, wenn ich schriee, hörte mich denn aus der Engel
Ordnungen ? und gesetzt selbst, es nähme
einer mich plötzlich ans Herz: ich verginge von seinem
stärkeren Dasein. Denn das Schöne ist nichts
als des Schrecklichen Anfang, den wir noch grade ertragen,
und wir bewundern es so, weil es gelassen verschmäht,
uns zu zerstören. Ein jeder Engel ist schrecklich.
손재준 역 :
내가 소리쳐 부른들, 천사의 서열에서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들어 주랴? 설혹 어느 천사 하나 있어
나를 불현듯 안아 준다 하여도 나는 그의 보다 강력ㄷ한
존재에 소멸하리라,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아직은 견뎌 내는 두려움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우리가 그처럼 찬탄하는 것도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일 따위는 멸시하는 까닭이다. 모든 천사는 두렵다.
최성웅 역 :
누구냐, 나 울부짖은들, 천사의 대열에서 그 누가
내 울음에 귀 기울여준단 말이냐? 심지어 그중 한 천사가
순간 나를 가슴에 품더라도, 보다 강한 존재로 인하여
나 사라질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내는
저 끔찍한 것의 시작일 따름이기에.
놀라운 점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데 있어
냉담하다는 것이다.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
코멘트 :
상기하였듯 천사를 대하는 시적화자의 태도는 「제1비가」와 「제10비가」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하기에 제1비가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단어 ‘Wer,/영어 who에 해당하는 의문부사이다’ 의 번역 역시 중요하다. 아직 개별자적 한계에 머무는 시적 화자 앞에, 그 존재를 넘어서는 천사의 등장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는 단순하며 즉각적고 생리적인, 단말마의 비명을 자아낸다. Wer라는 한 음절의 단어는 따라서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를 접하고 지르는 비명이 되어야 한다. 기존 한국어 번역에서 이를 인식하고 문장 첫머리에 비명으로 남기려 한 것은 최성웅 번역 외에 이정순 역(뉘라서,)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