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공원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 교향악단이 퀸 콘서트를 한다고 해서 나왔다. 음악을 듣든 그림을 보든 자주 내 작업의 재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언어가 아닌 다른 재료로 작업할 수 있었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바이올린 같은 비장함보다는 클라리넷이 내 몸체를 구성한다면 어땠을까, 좀 더 의심없는 근육이 내 중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인공지능의 발전에서 인간이 삶의 중심으로 잡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삶의 의미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 경쟁할 수 있는 언어며 바둑이며 색의 조합이며 대중성마저 인공지능이 압도할 시대가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압도가 없어도 과연 그런 것이 삶의 의미로 얼마나 기능할 수 있을까. 내 언어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곳에서 멋대로 움직이는데 그것에 대한 작업체로의 삶이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내 언어의 매개물로 강제되었다는 느낌. 아마도 생산보다는 얼마나 더 개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감수성이 주목받을 시대가 올 것인데, 생각만해도 매한가지로 시시하다. 이 시시함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데 여전히 견디는 나의 몸이 끔찍하다. 무언가 하고 깊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천둥벌거숭이처럼 방황하고 그럼에도 문학이 그런 내게 길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요원하다. 내가 가닿지 못할 것 같았던 것들이 나와 함께하는데 더는 내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기어코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욕구와 불만이 상잔하고 모두 자멸했나 보다. 적당한 몸의 피로와 원초적 쾌락 따위로 나를 쇠잔시키지 않으면 넘기기 힘든 무언가가 명치에 어느 때고 걸려 있다. 하루가 또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