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조금 읽어서, 예전 블로그에 있던 자료를 다시 올린다. 한국에서는 바르트는 말그대로 유명무실하다. 바르트 번역 수준이 전반적으로 너무도 처참한데, 그럼에도 책은 적당히 팔리고 저작권이 살아 있어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북한이 세계와 정상외교를 하여 북한에서 저작권을 사서 새로 번역하지 않는 한 저작권이 풀리는 2050년까지 제대로 된 바르트의 문체를 보기란 요원한 일일 것 같다. 텍스트의 즐거움 초반은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를 언급하며 시작하는데, 기존 번역 및 원문과 함께 내가 번역한 것을 소개한다.


vasistas 번역 :
이것은 어떤 개인에 관한 허구다. 그는 (테스트 씨와는 반대로) 통합이 아니라 그저 ‘논리적 모순이라는 오랜 유령’을 쫓아냄으로써 자기 안의 장벽·계급·소외를 파기한다. 양립할 수 없다고 알려진 말들마저 모두 뒤섞으며, 비논리적이고 불충실하다는 비난을 모두 묵묵히 감수한다. (자기모순이라는 극단의 구렁텅이로 타인을 이끄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와 합법적 폭정(얼마나 많은 형법 사례가 단일성의 심리학에 근거하고 있는가!) 앞에서도 무감하다. 이 자는 우리 사회에서 비천한 자로 남으리라. 법원·학교·수용소나 일상 대화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될 텐데, 누가 부끄럼 없이 모순을 견디겠는가? 그런데 [허구가 아니라] 실로 이러한 반영웅이 존재하니, 텍스트로 즐거움을 만끽하는 자, 그는 바로 독자다. 따라서 성서의 옛 신화가 돌아오고, 언어들의 혼잡은 형벌이 아니게 되며, 주체는 말들이 나란히 작동하고 공존함으로써 기쁨에 다다른다. 즐거움의 텍스트, 그것은 행복한 바벨이다.
 

원문 :
Fiction d'un individu (quelque M. Teste à l'envers) qui abolirait en lui les barrières, les classes, les exclusions, non par syncrétisme, mais par simple débarras de ce vieux spectre : la contradiction logique; qui mélangerait tous les langages, fussent-ils réputés incompatibles; qui supporterait, muet, toutes les accusations d'illogisme, d'infidélité; qui resterait impassible devant l'ironie socratique (amener l'autre au suprême opprobre : se contredire) et la terreur légale (combien de preuves pénales fondées sur une psychologie de l'unité!). Cet homme serait l'abjection de notre société : les tribunaux, l'école, l'asile, la conversation, en feraient un étranger : qui supporte sans honte la contradiction? Or ce contre-héros existe : c'est le lecteur de texte, dans le moment où il prend son plaisir. Alors le vieux mythe biblique se retourne, la confusion des langues n'est plus une punition, le sujet accède à la jouissance par la cohabitation des langages, qui travaillent côte à côte : le texte de plaisir, c'est Babel heureuse.

 

김희영 번역, 동문선 :

바벨


자신의 마음속에서 통합이 아닌, 다만 논리적 모순이라는 그 오래 된 유령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모든 장벽이나 계급·배타성을 파기하는 한 개인(누군가 발레리의 테스트 씨와는 정반대인 사람)의 허구적 이야기, 양립할 수 없다고 알려진 언어라 할지라도 모두 뒤섞으며, 비논리적이다·불충실하다는 비난을 모두 묵묵히 감수하며, 소크라테스적인 아이러니(타자로 하여금 자신과 모순되는 말을 하게 하는 그런 극단적인 수치로 몰고 가는)와 합법적인 테러(얼마나 많은 형법상의 사례가 단일성의 심리학에 근거하고 있는가!) 앞에서도 무감동하기만 한 사람. 그런 사람은 학교나 수용소, 일상 대화 등이 이방인으로 취급할 우리 사회의 비열한 자가 될 것이다. 누가 수치심 없이 모순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런 반영웅적인 인물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즐거움을 취하는 순간의 텍스트의 독자이다. 그리하여 성서의 옛 신화는 역전되며, 언어체의 혼란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닌, 주체는 서로 나란히 작업하는 언어의 공존에 의해 즐김에 이르게 된다. 즐거움의 텍스트, 그것은 행복한 바벨탑이다.

 

 


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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