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짧은 체류를 마치고 동경으로 돌아오기 전, 유유출판사 조성웅 대표로부터 『단단한 독서』 9쇄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단단한 독서』는 여러 모로 제게 고마운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번역가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작업한 인문서 중에 유일무이하게 제 생계에 직접적으로 보탬이 되었고 또 되고 있으며, 제 작업의 특성상 한정된 독자만을 상정하는 책들과 달리 여러 단계에서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열려 있고, 책의 저자인 에밀 파게도 처음 편역을 했던 이휘영 선생도 제게는 각별한 의미로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휘영 선생을 잠시 떠올리다 한국에서 예기치 않았던 두 친구와의 만남이 인상 깊었는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조금은 길게 잡문을 끄적이고 싶어졌습니다.

이휘영 선생


이휘영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대 중반에 프랑스어 학습을 시작할 무렵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어를 기반으로 한 좋은 프랑스어 교재나 문법서는 찾아볼 수가 없어 한국어 화자가 프랑스어를 깊이 배우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단 하나 예외로 훌륭한 불한사전이 있고, 그 저자가 바로 이휘영 선생입니다.


통용되는 불한사전으로는 『엣센스 불한사전』과 『프라임 불한사전』이 있는데, 후자가 네이버 사전 소스로 활용되어, 현재는 프랑스어 학습자 대부분이 프라임 사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만 불불사전의 번역에 지나지 않는 프라임 사전과 달리, 이휘영 선생의 『엣센스 불한사전』은 비인도유럽어권 화자가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언어를 감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작업물입니다. 예를 들어 objet라는 단어를 네이버에서 찾아보면 총 10개로 분류해 물체, 대상, 주제, 객체, 오브제 등의 의미만 나올 뿐 어째서 이 많은 의미가 하나의 단어에 담겨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휘영 선생이 집성한 에센스 사전을 볼 경우, 어원인 ob-jecere를 밝히고, 그 뜻이 ‘앞에(ob/devant) 던지다(jecere/jeter)’에서 왔음을 알려줍니다. 즉 내 앞에, 나와 대치하여 던져진 것이기에 대상(對象, Gegenstand)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내 안에 받아들이지 않고 밖으로 던지기 때문에 그 동작은 거부(objection)가 됩니다. 이처럼 한국어만을 두고 봤을 때 멀어만 보이는 단어 사이의 간격을 메꿔주고, 각각의 마디를 더듬을 수 있게 해주는 사전이, 최초의 불한사전인 『불한소사전』(1960)에서 시작하여 『엣센스 불한사전』(1984)이 나오기까지, 오직 한 명의 애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한 권의 사전과 제게 처음 프랑스어의 길을 밝혀주셨던 양창집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황무지와 같은 한국에서 제가 프랑스어를 잘 배우기는 불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문헌학적 토대가 빈곤한 한국에서 둘의 도움이 있었기에 인도유럽어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고, 나아가 라틴어나 독일어 등 다른 언어들을 통해 프랑스어를 겪을 수 있었습니다.

고바야시 히데오가 번역한 『테스트 씨』와 마츠무라의 중세 불어사전


그럼에도 뮌헨에서의 공부를 뒤로 하고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도 이휘영 선생은 제게 그저 혹은 오직 좋은 사전의 저자였습니다. 그리고 근현대시를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서구의 문예를 한국어로 담아내려는 사람으로서, 제 앞을 살아간 ‘선생’은, 보려하면 볼 수록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문학에 있어, 누군가는 언어에 있어 좋은 선생일 수 있었지만, 프랑스 문학을 한국어로 옮긴다는 행위에 있어 마냥 감탄하며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고, 세간에서 선생이랍씨고 문학이라며 포장된 사람들의 문체는 기만과 협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시를 번역한 파울 첼란, 그러한 첼란을 번역한 장-피에르 르페브르와 필립 자코테의 언어를 선생으로 삼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뒤늦게 일본에서 모리 오가이의 독일어 노트, 이쿠타 코사쿠의 불문학 번역, 고바야시 히데오가 선보인 『테스트 씨』 초역,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마츠무라 타케시의 『중세프랑스어사전dictionnaire du français médieval』 등을 보며 느낀 전율을 한국어로 느낄 순 없었고, 조금은 외로웠고 또 심심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김택규 중국어 번역가로부터 이름이 똑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유유출판사의 조성웅 대표를 소개받았습니다. 위화를 번역하기도 하였던 조성웅 대표가 만든 유유출판사는 지금에 와서는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1인출판사로 저역자 풀이 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1인출판사로서 성장하기 위해, 분량이 많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교양서를 내고자 했던 조성웅 대표가 제안한 책은 다름 아닌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l’art de lire』였습니다. 에밀 파게는 19세기 프랑스 작가로 한림원Académie Française 회원이었으며, 철학자이자 교육자 혹은 비평가로 당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저자가 오랜 공부 끝에 노년에, 어떠한 작위도 없이, 실증적으로 책을 읽는 법에 대해서 쓴 이 작품은, 도끼니 인생이니 하며 쓰잘 데 없는 인상평을 늘어놓는 기타의 책읽기 관련 책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정말로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단어를 살펴야 하는지, 문장부호를 어디까지 의식해야 하는지, 무엇을 읽지 말아야 하는지 등을 실제 텍스트를 예로 들며 면밀히 가르쳐 주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돌고 돌아, 공교롭게도, 완역이 아닐지언정 이 책을 먼저 1959년에 한국어로 옮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휘영 선생이었습니다. 프랑스어 학습의 시작을 함께해준 이휘영 선생의 흔적을 다시 발견해 기뻤습니다. 평소라면 번역하는 책의 다른 판본을 작업 중에 참고하지만, 뿌리도 없이 자라나는 제 언어가 선생의 언어와 어떻게 닮고 다른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번역이 끝날 때까지 선생의 번역을 부러 보지 않았고, 번역이 끝나고 나의 언어와 선생의 언어를 견주며, 비로소 제 앞에,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단 하나의 불문학번역가가, 선생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메이지 대학과 아테네 프랑세


한국어라 할지언정 선생의 언어와 저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시대적으로 우선 그에게 있어 한국어는 모국어가 아니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기 전, 일제 치하인 1919년에 태어났기에 그의 ‘모국’어는 일본어였으며, ‘모’어는 조선어였습니다. 두 언어의 긴장 속에서 자라났을 테고,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하던 그에게 학문의 언어는 일본어였을 테고, 그러한 일본어를 바탕으로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주로 일본어를 통해서 문학이라는 세계를 경험했을 터고, 1945년 광복절을 맞이한 다음 모국어가 한국어로 탈바꿈했기 때문입니다.

경성제국대학


평양 출신이었던 그가 어떠한 계기로 도쿄로 떠났으며, 언제부터 불문학을 공부할 결심을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불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일본으로 떠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제국대학의 하나로 여섯 번째로 세워진 경성제국대학에서 (일본어인) 국어국문학, 영어영문학, 조선어조선문학, 지나어지나문학을 전공할 수는 있었지만 불어불문학 전공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생은 도쿄의 메이지대학에서, 또 당시 일본에서 라틴어와 희랍어는 물론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중심 공간이었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였고, 해방 후 다음 해에 서울대학교로 탈바꿈한 곳에 불어불문학과를 창설하여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어로 불문학과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휘영 선생 이전에 조선인으로서 불문학을 접한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김억은 베를렌 등의 시를 옮기며 조선어 최초로 근현대시집 『오뇌의 무도』(1921)을  선보였고, 이휘영 선생에 앞서 손우성 등이 도쿄의 호세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며 해외문학파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들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조선어를 모어로 한 문예Literatur였을 뿐이고, 한국어를 기반으로 프랑스 문학Literaturwissenshcaft은 이휘영 선생이 학문Wissenschaft으로서 불어불문학과를 창립한 이후부터 가능했으니, 그를 두고 한국 불문학의 시작이라 말하여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1953년에 발간된 이휘영 번역과 1951년에 번역된 일본어역


또한 카뮈의 『이방인』 번역을 통해 비로소 한국에서 문학의 동시성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본래 Literature의 번역어로 정립된 문학이란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 또한 대체로 일본어를 통해 개화기부터 받아들였기에 남의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여전히 실존주의 이전의 서구문학은 한국(어)문학과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일본의 경우, 서구문학을 수입하고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번역을 통해 일본(어)문학이 성장하여 초현실주의 때부터 세계와 동일선상에서 문학을 한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퍼진 것을 보면 이러한 느낌도 꼭 틀리진 않을 테지요. 여하간 이휘영 선생의 한국어로의 『이방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의 설명 마냥 1951년에 ‘동양에서 최초의 번역되었다’라는 말의 진위와 상관 없이, —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 블로그 글을 참고해도 좋겠습니다 : https://tmitmi0228.tistory.com/121 —, ‘큰 의의’를 갖습니다. 이방인異邦人이라는 명사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호리 타츠노스케가 소매袖에 넣고 다닐 보물珍로 편찬한 『영일대역사전英和対訳袖珍辞書』 개정판(1867)에서 stranger의 역어로 소개되었고, 또 같은 이름으로 일본에서도 쿠보다 케사쿠가 1951년에 『이방인』 완역을 선보였습니다. 아마도 이휘영 선생의 번역도 이런 일본어와 일본문화로부터 무관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시작점이 달랐던 일본과 동시대에 카뮈를 소개했고, 불한사전도 없던 시기에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이러한 작업을 해내어 동시대 많은 독자에게 영향을 주고, 이후 평론가 김현이나 김화영 번역가 등을 통해 실존주의가 한국에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점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이휘영 선생을 한국 불문학의 끝이라 칭한 것은 자조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조선어와 일본어, 프랑스어, 한국어로 궤적을 그리며 선생이 문학을 통해 바라보던 근대와 한국은 어땠을까, 불모지로 막막했을지언정 어떠한 사명감이나 희망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되레 오늘날, 시간이 흐르고, 몇 세대에 걸쳐 불문학이라는 이름 하에 무언가 글들이 쌓였다 한들, 더는 매체의 중심이 문자나 문학인 시대가 끝나고, 선생께서 만드신 불문과에도 태반이 다른 이유로 대학과 학과에 진학하고, 대학원에 들어갈 때부터 교수자리 등을 염두하여 제한된 공부를 하고, 연구자도 번역가도 작가도 편집자도 독자도 저 스스로를 기만하며 탈바꿈된 문학의 껍데기를 좇는 불명불암의 어둠 속보다는 낫지 않았을까하는 상상 말이지요. 물론 이러한 뿌리 없음 혹은 뿌리 사라짐이 새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카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No soy coreano, ni soy japonés, yo soy desrraigado’ 라며 부르짓고, 김석범이 모어와 모국어를 구별하듯 Japanese-korean들을 관통하는 정서였을 테지요.

『군계』 4권 중에서


그러나 왜인지 저의 언어는 여전히 뿌리가 없는 것만 같고, 출판Publishing을 통해 독자Public을 만나려던 마음은 사그러든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다행인지, 이번 한국 체류에서는 이러한 삭막함을 누그려트려줄 친구 둘을 뜻하지 않게 만나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오직 자위로만 작업을 할 뿐인 저와 달리, 자라나는 미래를 위해, 혹은 어딘가 남아 있을 참된 독자를 위해, 작가로서 혹은 편집자로서,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책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게 ‘이편’은 없고 ‘저편’만 있다는 생각은 그냥 궁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휘영 선생에 대해 조금 조사를 해보다 휘영하다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텅 비어 허전하다’라는 뜻이라는데, 정말이지 휘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휘영함이야 말로 문학이며, 『군계』에서 한 공수空手도가의 말마따나, 공空하고 허虛하고 무無해서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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