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uela : 팔방치기

-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vasistas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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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게 그들은 몽환적인 파리를 밤의 증표들에 이끌려, 부랑자clochard의 문장에서 태어난 이정표들을 준수하며, 검은 거리 깊숙이 빛을 밝힌 다락으로부터, 믿음이 가는 작은 광장들에서 멈칫거리며, 벤치에 입을 맞추거나 팔방치기를 구경하고자, 아이들이 비석으로 의식을 치루고 한 발로 ‘하늘’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기 위해 걸었다. 마가는 몬테비데오에 친했던 여자아이들과 자신의 유년에 대해, 그리고 레데스마라는 사람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올리베이라는 전혀 들을 마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관심을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 귀를 기울였다. 몬테비데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별반 다를 게 없었을뿐더러 제 딴에는 어정쩡한 헤어짐들을 공고히 다질 시간이 필요했기에(트레블러 그 놈팽이 새끼는 뭘 하고 있을까, 떠날 때부터 무슨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휘말렸던 걸까? 가엾은 멍청이 게크렙텐은 어떻게 지내고 시내의 카페들은 여전할까), 올리베이라는 그녀의 말은 귓등으로 들으며 나뭇가지로 자갈에다가 그림을 그렸는데, 마가는 그동안에도 쳄페와 그라시엘라가 어째서 좋은 사람인지, 루시아나가 배에 마중 나오지 않아 얼마나 슬펐는지, 그리고 루시아나는 스놉인데 누가 됐든 그런 꼴은 봐 줄 수가 없다며 조잘댔다.

     “뭘 두고 스놉이라는 거야?” 조금은 더 마음이 동하여 올리베이라가 물었다.

     “그러니까,” 스스로도 멍청한 소리를 하려는 걸 모르진 않았는지 마가는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내가 여기 삼등석을 타고 왔잖아, 근데 이등석을 탔다면 루시아나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겠냐는 거지.”

     “아주 난생 처음 들어보는 최고의 정의네.” 올리베이라가 말했다.

     “그리고 로카마두르도 있었어.” 마가가 말했다.

     그렇게 올리베이라는 로카마두르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몬테비데오에서는 그는 그냥 점잖게 카를로스 프란시스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 마가는 로마카두르의 창세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았고, 다만 낙태를 거부했다가 이제 와서는 후회중이라 말했다.

     “그래도 정말로 후회하지는 건 아니야,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지. 이렌 아주머니가 많이 챙겨 주기도 하고, 어떻게든 노래 공부를 해야지 뭐.”

     마가는 자신이 어째서 파리에 왔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했으며, 올리베이라는 그녀가 만약 행선지나 여행사 및 비자 발급에 문제가 있었다면, 지금쯤 싱가포르나 케이프타운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에게는 오직, 자신이 몬테비오로부터 벗어났으며 자신이 점잖게 ‘삶’이라 부르는 것을 직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였다. 파리에 있어 정말로 좋은 게 뭐냐면, 그녀가 프랑스어를 제법 (피트만 보습학원에서 배운 수준보다 more) 할 줄 알았으며, 최고의 그림과 최고의 영화들, 가장 혁혁한 형태의 Kultur를 볼 기회가 많다는 것이었다. 올리베이라는 그런 모습에 뭉클해서는, (비록 왜인지는 몰라도 로카마두르 관해서는 조금 충격적이기는 했으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알던 재기 넘치는 여자들을 떠올려 보았는데, 그들의 경우 아무리 전 지구적 차원에서 형이상학적 고민을 한들 마르-델-플라타 너머로 떠나기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왈가닥은 심지어 아들도 품에 안고서, 3등석에 몸을 싣고, 지갑에는 땡전 한 푼도 없이 노래 공부를 한답시고 파리에 왔다. 그리고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자신에게 보는 법과 바라보는 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이때의 가르침이란 그녀 스스로는 짐작도 못했을 테지만, 어슴푸레한 초록색 불빛 말곤 아무것도 없는 현관을 보려고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던지, 건물 관리인 아주머니의 노여움을 피해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낡은 조각상이나 덩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넓은 안뜰에 나타나 그저 닳아빠진 둥근 자갈 타일을, 벽을 뒤덮은 푸른 이끼를, 무슨 벽시계라도 되는 양 구석에 그늘로 자리잡은 노인을 바라보며, 그리고 고양이들에게, 언제나 필연적으로 희고 검고 얼룩지고 회색빛을 띠는 야옹이 나비 miaumiau kitten kat chat cat gatto, 시간과 미지근한 포석의 주인들에게, 배를 간지럽히며 멍청함과 신비로 점철된 말을 건네는 그녀를 변치 않고 받아주는 그녀의 친구들에게,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와서 조언과 주의를 주는 식이었다. 마가와 함께 걷다 보면 올리베이라는 문득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짜증을 부리지는 않았던 게, 그녀가 저지르는 일이란 대개 웨이터에게 한 소리 듣고자 맥주잔을 뒤엎는다든지 탁자 밑으로 다리를 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가의 특정 방식에 항상 짜증이 났던 건 사실인데, 이를테면 정해진 일을 정해진 대로 하지 않는다거나, 계산서에 앞자리 숫자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서 대신에 Modesto 3에 늘어선 줄에 넋을 잃는다든지, 아니면 길 한복판에(검은색 르노 자동차가 2미터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더니 머리를 내밀고는 피카르디아 억양으로 씨발씨발거린다), 거리 한가운데 서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멀리 팡테옹을 바라보고는 인도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식으로 그 외에도 비슷한 일을 많이 저질렀는데, 그럼에도 그는 그녀와의 시간이 행복하였다.

     페리코와 로날드하고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마가에게 에티엔을 소개받았고, 에티엔이 그들에게 그레고로비우스를 소개해 주었다. 구사회는 생-제르맹-데-프레에서 지새던 밤들 가운데 결성되었다. 모두 얼마 안 있어 마가를 마치 피치 못할 자연적 현존으로 받아들였는데, 물론 그렇다 해도 자신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설명해줘야 했으며, 그녀가 포크를 절도 있게 사용할 줄 몰라 공기 중으로 감자튀김을 날리면 그것이 곧잘 다른 탁자에 앉은 사람들의 머리로 쇄도하여 사과를 하기 일쑤였고, 자각이라는 게 있냐며 그녀에게 타박을 주는 등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구사회에서 마가는 매우 골칫거리의 존재로, 올리베이라는 점차 그녀가 모임의 사람들을 각자 따로 만나고 싶어하는 것을, 에티엔이나 밥스와 함께 밖에 나간다든지, 아닌 척 하면서도 정작 그들을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는데, 어차피 다들 버스 노선이나 일상의 궤도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 마지않는 사람들이었기에, 회원들은 틈만 나면 마가를 질타하면서도 저마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감사를 느꼈다. 에티엔은 우체통이나 개마냥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사람이었는데 마가가 그의 그림 앞에 서서 생각나는 대로 무언가 내던지면 낯빛을 파랗게 질려 했고, 페리코 로메로는 결국에 여자라기엔-마가가-보통이-아니다를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몇 주고 몇 달이고 (날짜를 세기란 미래에 대한 에르고ergo 없이 마냥 해복한 올리베이라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여러 사물들을 바라보며, 일어나야 할 일들을 일어나게 내버려두며, 서로 좋아하고 서로 다투며, 그리고 신문에서 다루는 기사나 가족으로의 의무를 외면하고서, 어떤 형태로든 재정적이고 도덕적인 부담을 주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난 채로, 파리 전역을 가로지르며 걷고 또 걸었다.

     똑, 똑.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리자고.” 이따금씩 올리베이라는 말했다.

     “왜 그래야 하는데.” 퐁-뇌프로부터 오는 거룻배들peniches을 바라보며 마가가 말을 이었다. “똑, 똑, 머리에 뭐 새라도 들었나봐. 똑, 똑, 그래서 항상 당신을 쪼아대는 거야, 아르헨티나 음식을 달라는 거라고. 똑, 똑.”

     “알았으니 그만해.” 올리베이라가 투덜거렸다. “나를 로카마두르로 착각하지 말라고. 이러다가는 또 식료품점이나 관리 아주머니 앞에서 글리글리코로 말하게 되고, 그럼 아주 사단이 날 거야. 저기 흑인 여자애 꽁무니를 쫓는 녀석 좀 봐.”

     “나 저 여자애 알아, 프로방스 길 커피숍에서 일해. 근데 쟤는 여자를 좋아하는데, 참 불쌍하네, 쓸데없는 일이나 하고 말야.”

     “자기한테도 수작을 부렸어?

     “당연하지. 하지만 어쨌거나 우린 친구가 됐어, 내가 루즈도 줬고 나는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는데, 작가가 누구더라, 레테, 아니... 잠깐만, 레티...”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고. 정말 같이 안 잔 거 맞아? 당신이라면 관심 가졌을 법도 한데.”

     “오라시오, 자긴 남자란 자 보긴 했고?”

     “그럼. 다 경험 아니겠어, 알잖아.”

     마가는 눈을 흘기면서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이게 다 머릿속에서 똑 똑 거리는 새 때문에, 아르헨티나 음식을 달라는 조르는 새 때문에 뿔이 나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는 올리베이라에게 몸을 날려 마침 생-쉴피스 길을 지나가던 부부를 놀라게 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마가는 올리베이라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웃어댔고 올리베이라는 그녀의 두 팔을 억눌렀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그들을 보면서 남편 쪽은 어렵사리 미소를 지었고, 부인은 그들의 행실에 경악을 마지않았다.

     “당신 말이 맞아,” 올리비에가 결국에 시인했다. “나도 참 구제불능이군. 결국 그렇게 잘 자 놓고서도 정신 차리자는 말이나 하고.”

둘은 어느 진열창 앞에서 걸음을 멈춰 책들의 제목을 훑었다. 마가는 책의 색깔이나 형태들을 따라가며 질문을 던졌다. 올리베이라는 플로베르의 위상에 대해, 몽테스키외가, 레몽 라디게가 어떤 사람인지, 테오필 고티에가 언제 적 사람인지를 알려주어야 했다. 마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열창에다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머릿속에 새가 한 마리 있어 아르헨티나 음식을 먹고 싶대요”, 올리베이라가 되뇌며 생각에 잠겼다. “내 신세 하고는, madre mía.”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걸 모르겠어?” 결국 그가 말했다. “자기야, 당신은 길에서 교양을 쌓으려 하는데, 그건 가능하지가 않아. 그러려면 리더스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나 구독하라고.”

     “싫어, 그런 쓰레기를 어떻게 읽어.”

     머릿속 새 한 마리, 올리베이라는 되뇌었다. 하지만 이는 그녀를 향하는 말이 아니었고,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머릿속엔 무엇이 있지? 공기든 옥수수 가루든 간에 무언가 수용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리라. 그녀의 중심은 머릿속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과녁을 명중시킨다”, 올리베이라는 생각했다. “바로 발사의 선-체계다. 하지만 체계라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마가는 그저 과녁을 맞출 따름이다. 반대로 나는... 똑 똑. 뭐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마가가 선-철학에 대해 질문을 하였을 때(이는 구사회에서 가능한 일로, 모임에서는 동경의 대상이나 아득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것들은 까마득하기에 근본적인 것들로, 동전의 뒷면으로, 언제나 보는 달의 뒷면으로 여겨졌다), 그레고로비우스는 애써 그녀에게 형이상학의 기초를 설명하려 했으나, 올리베이라는 페르노를 홀짝이며 그런 광경을 보고 즐거워했다. 마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든다는 것은 무분별한 짓이었다. 포코니에가 맞았는데, 그녀 같은 사람들에게 신비란 설명과 함께 태동되었다. 마가는 내재성과 초월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니 예쁜 눈을 반짝이며 그레고로비우스의 형이상학을 잘라먹었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선을 이해했다고 납득하기에 이르렀으며, 힘이 들었는지 숨을 내리쉬었다. 그들 가운데 오직 올리베이라만이 깨달을 수 있던 사실이 있는데, 결국 그들이 변증법으로 구하고자 하는 시간 밖 거대한 테라스란, 매 순간 마가가 모습을 비추는 장소에 불과하였다.

     “멍청한 말들은 넘겨버리지 그래?” 그가 충고했다. “쓸 필요도 없는 안경을 굳이 왜 쓰려고 하는지.”

     마가는 조금 불신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쉬지 않고 장장 세 시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올리베이라와 에티엔에게 끔찍하리만치 감탄하였다. 그녀는 에티엔과 올리베이라를 두르는 백묵의 구체 속으로 들어가, 어째서 문학에서는 미결정 원칙이 그토록 중요한지, 어째서 그들이 그토록 언급하고 감탄해 마지않는 모렐리가 자신의 책을 수정구로 만들어, 소멸하는 환시 속에서, 미시우주와 거시우주를 하나로 합하고자 하는지 알고 싶었다.

     “너한텐 설명이 안돼.” 에티엔이 말했다. “이건 메카노 7인데 넌 끽해야 2에 머무르고 있거든.”

     이에 마가는 슬픔에 잠겼고, 길가에서 나뭇잎을 하나 줍더니 잠깐 그것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나뭇잎을 손바닥에 올려렸다 눕혔다 돌렸다 빗겨주더니 결국은 잎몸을 벗겨 잎맥을 드러내었는데, 그녀의 피부를 바탕으로 그것은 복잡다단한 초록색 환영이 되었다. 에티엔은 갑자기 잎을 빼앗아서는 빛에 비추어보았다. 이런 일들이 있기에 그들은 그토록 마가에게 감탄하였고 그녀에게 거칠게 굴었던 것을 조금은 부끄러워했는데, 그러면 마가는 이 때다 싶어 다시 맥주를 시키고 또 감자튀김도 좀 주문할 수 있는지를 묻곤 하였다.

 

(-7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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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uela : 팔방치기

-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vasistas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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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침대에 앉은 오라시오 올리베이라의 목에서 세 번째 불면의 담배가 타들어 갔다. 앞서 그의 손이 한두 차례 기대어 잠든 마가의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치기도 하였다. 때는 월요일 새벽이었고, 일요일 오후와 저녁 외출을 포기하고서 책을 읽고 음반을 들었고, 교대로 일어나 카페를 데우거나 마테를 말았다. 하이든의 사중주가 끝날 무렵 마가는 잠이 들었고, 올리베이라는 더 듣고 싶지가 않아 침대에서 전축 코드를 뽑아버렸다.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음반은 몇 번의 회전을 이어갔다. 왜인지 몰랐지만 이 무기력한 멍청함에 그는 몇몇 곤충들이나 아이들의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움직임들이 떠올렸다. 잠이 오지를 않아 열린 창문 너머로, 가끔 꼽추 바이올리니스트가 오후 늦게까지 연습을 하기도 하는 다락방을 쳐다보았다. 날씨가 덥진 않아도 마가의 몸에 오른쪽 옆구리와 발이 따뜻했다. 천천히 마가로부터 떨어져 나와, 긴긴 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데, 이는 언제나 마가와 서로 화를 낸다거나 부딪치지 않고서 만남을 끝낼 때 느꼈던 것과 동일한 감정이었다. 로사리오 지방의 견실한 변호사인 동생의 편지는 읽는 둥 마는 둥 하였는데, 동생은 네 장의 종이비행기를 날려가며 올리베이라가 외면한 시민과 자식 된 도리에 대해 역설하였다. 이런 편지를 보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었기에, 자신의 친구들도 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벽에다 편지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올리베이라에게는 동생이 섬세하게도 ‘중개소’라 불렀던 암시장을 통해 돈이 제대로 들어왔냐 만이 중요했다. 읽고 싶었던 책을 몇 권 사고, 마가에게 3천 프랑을 주어 그녀가 원하는 걸 하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물론 그럴 경우 그녀는 진짜로 코끼리만한 인형을 사서는 로카마두르에게 깜짝 선물로 주려 할 테다. 날이 밝으면 트루이 노인한테 들려 라틴아메리카 관련하여 업데이트를 해주어야 한다. 외출하고, 행사하고, 업데이트 하고, 이런 것들은 수면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업데이트라니, 이 무슨 표현이란 말인가. 행사하다. 무언가를 하다, 잘하다, 배변하다, 겸하다, 하다라는 패로 가능한 모든 유의 행위들. 하지만 모든 행위의 배후에는 반론의 여지가 남아있는데, 왜냐하면 하다라 함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어디로부터 나오고,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게끔 무언가를 움직이고, 옆집에 들어가거나 말거나 하기보다는 이쪽 집으로 들어가기를 의미하기에, 그러니까 모든 행동은 결여를 인정하고 아직 행하지 않은 무언가를 납득하는 것으로, 그때 반론은 아무런 말없이 계속되는 결핍·감소·현재의 빈곤으로부터 말미암은 자명함과 마주한다. 행위가 충족이 될 수 있다거나 행위의 총합이 정말로 이름에 걸맞게 하나의 삶과 등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도덕주의자적 망상이다.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날 텐데, 행위의 포기란 행위의 가면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반론이기에 그러하다. 올리베이라는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고, 그는 자신의 이런 최소 행위에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또 동시에 스스로를 비웃을 뿐이었다. 그에게 표면적인 분석이란 사소할 따름으로, 그런 분석이란 거의 언제나 부주의나 문헌학적 올가미들로 인해 변질되기 마련이었다.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명치에 걸린 무게로, 무언가 잘 굴러가지 않으며 또 거의 단 한 번도 제대로 굴러간 적이 없다는 물리적 의혹이었다. 글러가건 말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는데, 애당초 그는 원한을 품은 채 쓸쓸히 방사성 동위원소나 바르틀로메 미트레의 임기에 관한 연구를 한다든지, 아니면 집단적인 거짓말을 거부해 왔다. 만약에 그가 젊어서부터 무언가를 선택했다 하여도,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나의 ‘문화’를 쌓으려고 안달이 난 방식은 아니었을 텐데, 왜냐하면 문화란 전형적인 아르헨티나 중산계급의 것으로, 제 몸뚱어리를 국가적 현실이라든지 그 밖의 다른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자신이 그러한 현실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공허함으로부터 모면했다고 믿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동창생이었던 트레블러의 정의대로 일종의 체계적 게으름 덕에 바리새인들의 질서 (많은 친구들이 대게 선의로 그 안에서 활동하였으니, 실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전례가 있었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애당초 질서란 종류를 막론하고 질서의 특수화를 통해 문제의 근본을 회피하고, 또 질서를 행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가장 아르헨티나다움에 이바지하기 마련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행위나 포기의 문제에다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거나 에스키모인이라는 식의 역사적 문제를 뒤섞는 것도 기만적이고도 안이한 일로 여겼다. 그는 이미 등잔 밑이 어둡다며 쉽게 간과하는 것들을, 객체의 개념 속 주체의 무게에 의혹을 둘 만큼 오래 살았던 것이다. 마가는 매우 드문 여자로, 어떤 유형의 얼굴이 공산주의나 크레타미케네 문명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주는지, 또 한 사람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기를란다요나 도스토예프스키를 느낄 수 있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올리베이라는 자신의 혈족이라든지 근엄한 숙부들 사이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청소년기의 몇몇 반항적인 사랑이나 툭하면 드는 무기력함이, 자신의 우주관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납득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중산계급이었고, 포르테뇨고 국립학교였으며, 그리고 이런 사항들은 그냥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좋지 못한 습관이 있었는데, 그는 여러 관점들을 극단적으로 위치시키기가 두려운 나머지, 모든 것의 긍정과 부정을 너무 재다 못해 죄다 받아들이고, 저울바늘에서부터 저울판을 바라보려 들었다. 파리에서 모든 것은 부에노스아이레스였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모든 것은 파리였다. 맹렬한 사랑 속에서 그는 손실과 망각을 겪고 또 맛보았다. 유해하고 안락하다 못해 반사와 기술이 되기 십상인 태도로, 완벽하게 멍청한 육상선수의 실명이자 중풍환자의 끔찍한 명석함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부랑자clochard와 철학자의 굼뜬 걸음으로 삶을 활보하기 시작하니, 그럴수록 활기찬 행위들이 순수한 대화 본능으로, 진실을 파악하는 대신 더는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보다 주의 깊은 의식의 실천으로 소급된다. 세속적 정숙주의, 절도 있는 아타락시아, 주의 깊은 부주의함. 올리베이라에게는 이렇게 졸도하지 않고서 투팍 아마루식 분할을 목도하는 것이 중요할 뿐, 그의 주변에서 날마다 모든 가능한 형태를 띠고서 선언되는 가엾은 자기중심주의(신토불이주의, 교외중심주의, 문화중심주의, 민속중심주의)로의 함몰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거룩하신 숙부님들의 역사정치적 설교 말씀이 있던 오후, 몇몇 천국의 그늘 아래에서, 흥분해서는 쾅쾅거리며 “내가 말하려던 게 그거라니까!(¡Se lo digo yo!)”라는 너무도 스페인-이탈리아-아르헨티나적 표현에 처음으로 수줍게나마 반응할 수가 있었다. Glielo dico io! 그건 내가 말한다니까 멍청아! 이 ‘나yo’라는 것을 두고 오라시오는, 이 말엔 무슨 확증해줄 만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어른들이 말하는 나에는 무슨 전지전능함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을 했다. 열다섯 살에 이르러 그는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함을 알 따름이다”를 배웠다. 그리하여 이로 인한 독배는 피치 못할 것으로 여겨졌으니, “내가 말하려던 게 그거라니까”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에게는 바가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는 문화적으로 상위 형태를 띠는 것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권위와 영향의 무게라든지 좋은 독서에서 비롯된 믿음들이,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가 말하려던 게 그거라니까”를 정교하게 은닉된 방식으로 생산하는지 확인하며 즐거워하였는데, 심지어 그곳에서는 당사자들조차 자신의 의도를 모른 채 “필자가 항상 믿었던 바”, “내가 무언가 확실히 안다 가정할 경우”, “분명한 것은” 따위의, 결코 반대 관점으로부터 냉정한 평가를 받았을 리 만무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인류가 각각의 개별자를 감시하여 톨레랑스·지적 의심·감정적 왕래의 노정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어느 한 점에 이르러 티눈이, 경직이, 의미가 태어난다. 오 흑과 백이여, 진보와 보수여, 동성애와 이성애여, 구체와 추상이여, 산로렌소나 보카주니어여, 고기와 채소여, 사업과 시여. 이는 이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인류는 올리베이라와 같은 유형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의 편지가 바로 이러한 거절의 표현이었으리라.

     올리베이라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들에서 문제가 뭐냐면 언제나 영혼의 방랑과 다정함animula vagula blandula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과 함께 더는 잠을 잘 수가 없다. 오블로모프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cosa facciamo? 역사의 위대한 목소리들이 행동을 촉구한다 : Hamlet, revenge! 햄릿이여, 복수를 하자, 아니면 조용히 치펜데일에 앉아 슬리퍼를 신고 따뜻한 불이라도 쬐려 하는가? 모든 일이 있고서도 시리아인은 마르타를 찬양하여 공분을 샀으니, 이는 익히 알려진 바다. 아르주나여, 전쟁을 벌일 셈이냐? 우유부단한 왕이여, 너는 가치들을 부정하지 못한다. 투쟁을 위한 투쟁, 험난한 삶, 생각해 보라, 에피쿠로스주의자 마리우스를, 리차드 힐러리를, 쿄를,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 행복하여라 선택하는 자들, 선택을 받아들이는 자들, 훌륭한 영웅들, 훌륭한 성인들, 완벽한 현실도피주의자들”.

     그럴 수 있다. 어째서 아닐까? 하지만 그의 관점이 포도를 탐하는 여우의 관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에게 일리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하지만 그때의 일리란 거북하고 통탄할만한, 매미에 맞서는 개미의 일리다. 만일 명석함이 무위로 끝이 난다면 그 때의 명석함이란 의뭉스러운 것으로, 무언가 유난히도 악마적인 실명을 가리려 들지 않겠는가? 화약을 품고 뛰어드는 전쟁영웅의 어리석음, 영광을 온 몸에 두른 용사 카브랄, 사실 이것들은 내심 총괄적인 바라보기를 종용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순간 무언가 절대적인 것을 간파하기를, 새벽 세 시 담배가 타들어가는 침대에서, 온 의식 너머로(이는 부사관에게 요구되는 일이 아니다), 두더지보다도 그리 뛰어나지 못할 일상의 혜안이나 사무실의 명석함과 마주하기를.

     그는 이 모든 걸 마가에게 말했는데, 앞서 잠에서 깨어났던 마가는 잠에 겨운 고양이처럼 그에게 붙어 몸을 웅크렸다. 눈을 뜨고서,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신은 못 할 거야,” 그녀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기에 앞서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거든.”

     “행위에는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이 멍청한 여자야.”

     “원칙에서 출발한다고?” 마가가 말했다. “뭐 그리 복잡해. 당신은 목격자 같아, 박물관에 가서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이라고. 뭔 소리냐 하면 박물관에 그림들이, 그리고 당신이 있다는 말이야,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멀리. 나는 하나의 그림이고, 로카마두르도 그림이야. 에티엔도 하나의 그림이고, 이 방도 하나의 그림이야. 이 방에 있다 생각하지만 당신은 이곳에 있지 않아. 방을 바라보고 있지만 방에 있지는 않아.”

     “이 아가씨가 아주 사도 도마 뺨치시는군.” 올리베이라가 말했다.

     “어째서 사도 도마야?” 마가가 말했다, “그 직접 봐야지만 믿을 수 있던 멍청이?”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올리베이라는 내심 마가가 제대로 맞추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녀는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으며, 지속과 함께 육체를, 삶의 연속을 형성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방 안에 있고, 함께 살아가고 만지는 모든 것에, 강물 아래 물고기에, 나무 속 잎사귀에, 하늘 속 구름에, 시 속 이미지에, 모든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있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물고기, 잎사귀, 구름, 이미지. 바로 이런 것들인데, 다만...

 

(-84장)

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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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uela : 팔방치기

-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vasistas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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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기에서의 처음이 무엇이었느냐면, 우선 피를 뽑고, 심적으로 뚜드려 맞고, 바보 같은 파랑색 여권이 가방 주머니에 잘 있나 확인하고, 호텔 열쇠가 선반 못에 얌전히 걸려있는지를 느껴야만 했다. 두려움, 무지, 찬란한 눈부심. 여기는 그렇게 이름 불리고 또 그에 걸맞기가 요구된다. 도시가 곧 내게 미소를 지을 테고, 이 길을 지나 식물원Jardin des Plantes이 시작된다. 파리, 더러운 거울 옆 클레의 그림이 담긴 엽서. 어느 오후 마가는 세르슈-미디 길에 등장하였고, 이후 통브-이수아르 길가 내 집에 오를 때면 언제나 꽃 한 송이를, 클레나 미로의 엽서를, 그리고 돈이 없을 경우에는 공원에서 플라타너스 나뭇잎 한 장 정성스레 주워 왔다. 당시 나는 새벽 거리에서 철사나 빈 상자를 모았는데, 그것들로 흔들개비라든지 난로 위를 빙빙 도는 장식을, 또는 마가가 색칠을 도와준 무용한 기구들을 만들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다만 비판적이고 집착 없는 기예로 사랑을 행하였으며, 하지만 그럼에도 끔찍한 침묵에 잠기는 동안 맥주잔 속 거품은 미적지근 무슨 뱃밥 모양 쪼그라들었으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바로 이런 게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가가 몸을 일으켜 의미 없이 방 안을 돌아다닌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감탄을 한다든지, 무슨 사이렌 동상마냥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서 부드러운 눈길로 제 몸을 어루만졌는데, 그런 그녀를 보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나는 끝내 저항하다 못해 그녀를 옆으로 불렀고, 그러면 그녀는 조금씩 내 위로 포개어지더니, 제 육체의 영원성을 마주하고서는, 잠시 그토록 하나 되고 그토록 사랑에 빠졌다가, 그러고는 다시 둘로 나뉘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가급적 로카마두르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쾌락이란 이기적인 것으로 그것은 신음과 함께 좁은 이마로 우리를 들이박고, 소금기 가득한 손으로 우리를 붙들었다. 나는 마가의 무질서가 매 순간 발생하는 자연적 조건이라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는 로카마두르를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데운 면발로 옮겨 갔다가, 와인과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뒤섞었으며, 한달음에 내려가 길 모퉁이 할머니가 굴을 두 접시 까주기를 기다리다, 노게 부인의 조율 안 된 피아노로 슈베르트의 선율이나 바흐의 전주곡을 연주하고,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를 참아가면서 소고기 스테이크와 절인 오이를 곁들였다. 우리 생활의 무질서는 다시 말해 화장실의 비데가 자연적이고 완만한 힘에 의해 디스코텍이라든지 답장을 기다리는 파일로 변하는 식의 질서로, 마가에게 실토하기는 싫었으나 그것이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규율로 보였다. 나는 얼마 안 있어 마가에게는 방법론적 용어로 현실을 제기할 필요가 없음을, 무질서를 찬양하기란 그녀에게 있어 무질서를 성토하는 것만큼이나 분란을 일으키는 일임을 알았다. 그녀에게 무질서란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그녀가 들고 다니던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레오뮈르 길에 위치한 카페에서, 비가 내리고 우리가 서로를 갈망하기 시작했을 때) 그 사실을 알아챘고, 그런 다음에는 오히려 그를 받아들이고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내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대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바, 그렇게 수차례 며칠이고 정리도 안 해 헝클어진 침대에 누워, 지하철 꼬마아이 탓에 로카마두르 생각이 났다며 눈물 흘리는 마가를 본다던지, 알리에노르 다키텐 여공의 초상화를 보고 나서 머리를 빗거나 여공과 닮고 싶어 죽으려는 모습을 바라보면, 문득 내 삶에 이런 것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피곤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음이었다는 생각에 정신적 트림을 해댔는데, 이는 바로 나 자신이 순수한 변증법적 운동에, 올바른 처신을 대신하여 그릇된 처신에, 부화뇌동하는 정숙함보다는 변변찮은 부정에 머물렀기 그랬으리라. 마가는 머리를 빗고, 머리를 헝클고, 다시 머리를 빗었다. 로카마두르를 생각했고, 후고 볼프의 노래를 몇 곡 (조악하게) 불렀으며, 내게 입을 맞추면서 자기 헤어스타일이 어떤지를 묻고 노란 종이에 그림을 그렸는데, 이 모든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였으며, 반면에 나는 구태여 더러운 침대에 누워 구태여 미지근한 맥주를 마셨으니 이것이 언제나 나이자 나의 삶이었으며, 또 타인들의 삶과 마주한 나의 삶을 동반하는 나였던 셈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내가 이렇게 의식 있는 쭉정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이나 자랑스러웠고, 뜨고 지는 달들과 달들 아래, 마가와 로날드와 로카마두르와 클럽과 거리와 내 도덕적 질병들과 그 밖의 고름들과 베르트 트레파와 가끔의 허기와 나를 곤궁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트루이 할아버지가 만들어내는 셀 수 없는 이변들 가운데, 온갖 종류의 음악과 담배와 같잖은 비열함과 거래들이 쏟아지는 수많은 밤 아래, 그저 이 모든 것들의 위나 아래에서, 도무지 나로서는, 그러니까 최소한의 정숙함만 있다면 (정숙함이라니!) 더럽혀진 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또는 통상의 보헤미안들 행세를 하고 싶지가 않았는데, 왜 그런가 하냐면 이런 주머니만한 크기의 혼돈이란 정신의 상위 질서이거나 부패이기 매한가지인 임의의 징표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가를 만났고, 본인도 몰랐지만 그녀는 나의 목격자이자 첩자였기에 나는 이 모든 생각에 언제나 거북해 하였고, 또 존재보다는 사유가 내게는 훨씬 더 쉬운 일이며, 짤막한 문장의 에르고ergo가 그닥 에르고나 그와 유사한 무엇도 아니라는 데 짜증이 났는데, 그렇게 우리는 함께 좌안을 걸었고, 마가는 자신이 나의 첩자며 목격자임을 모르는 채로, 내가 엄청나게 다양한 것을, 문학에 정통하였을뿐더러 cool 재즈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봤을 땐 엄청 신비한 것들을 알고 있다며 감탄을 해댔다. 나는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일종의 길항작용으로 그녀와 가까워짐을 느꼈고, 우리는 쇠와 자석의, 수비와 공격의, 벽과 공의 변증법으로 서로를 좋아했다. 짐작하기로 그녀는 내게 환상을 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내가 뭇 편견들로부터 치료된 자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편견들에, 좀 더 가볍고 좀 더 시적인 편견들에 가닿는 중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나는 불안한 만족과 거짓 휴전의 한복판에서, 팔을 뻗어 파리라는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스스로를 둘둘 휘감는 무한의 재료를, 창문에 비치는 다락방과 구름과 대기의 마그마를 만져보았다. 바야흐로 무질서는 없으며, 바야흐로 세상은 무언가 단단한 돌이 되어 쌓여만 갔으며, 경첩을 중심으로 돌도 도는 놀이장치로, 거리와 나무와 이름과 나날이 뒤섞인 타래로 변해갔다. 그곳에는 탈출구가 되어줄 무질서가 존재치 않으며, 그저 불결과 비참이, 맥주 찌꺼기가 남은 컵들과 구석에 웅크린 양말이, 머리카락과 섹스를 풍기는 침대만이, 그리고 투명하고도 얇은 손을 뻗어 내 근육을 더듬고 공허 가득한 각성상태로부터 잠시나마 나를 벗어나게 할 애무로 애태우는 한 여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너무도 늦어 버린 게, 언제나 그렇하듯, 그토록 많은 사랑을 나누었음에도 정작 행복은 다른 것이어야 했기에, 이곳에서의 행복과 쾌락보다는 더욱 슬픈 무엇이어야만, 섬과 같은 분위기이거나 일각수여야만, 부동 속 끊임없는 추락이어야만 했다. 마가는 알지 못했다, 나의 입맞춤이 그녀 너머로 열리는 두 눈과도 같은 것임을, 내가 이탈한 자 되어 나아가고 세상의 다른 형상으로 화하고 있음을, 어지러움에 비틀거리는 항해사로 검은 뱃머리에서 물과 시간을 가르며 항해함을.

     이 50년대의 나날에 나는, 무언과 발생했을 법한 개념과 마가 사이에 감금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가의 세계와 로카마두르의 세계에 반기를 들기란 어리석은 짓으로, 혹여 독립을 한들 그 즉시 더는 자유롭다라고 느끼지 못하게 될 거라고, 온 세상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나는 누구와도 비교가 불가능한 위선자로서 내 살갗과 다리가 감시당하는 일에, 내가 마가를 누리는 방식은 물론이고 목책 너머 키에르케고르를 읽으려는 울타리 속 앵무새로서의 나의 시도들이 정탐 당하고 있음에 곤혹스러웠는데, 특히나 마가 자신이 내 목격자라는 의식이 없을 뿐 아니라, 반대로 나를 유아독존의 존재로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성가신 일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이 아니다. 정말 화가 나는 건, 결국 내가 마가의 세계에 감금되었다 느끼는 요 며칠만큼이나 자유에 근접하기란 앞으로 불가능할 것이며, 해방에 골몰하려는 행위 자체가 기실 패배를 인정하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반합의 구타들로는, 마니교적 스크린샷이나 멍청하고도 성마른 이분법으로는, 마가가 나를 끌고서 로카마두르를 보러 가던 몽파르나스 역 계단들로 걸음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어째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질서·무질서·자유 따위의 개념들을 세운다던지 설명을 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으며, 로카마두를 그냥 코차밤바 길 안뜰에서 제라늄 화분을 나눠주는 사람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아마도 올리브 정원이나 똥통의 문고리를 찾기 위해 더욱 더 어리석음에 빠져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 순간 나를 놀래킨 건, 바로 마가가 자기 아들을 로카마두르라고 부르는 지점까지 자신의 판타지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구사회에서 논리를 찾아내는 데 진력이 났던 반면, 마가는 그저 아들 이름이 아버지와 똑같으며, 이제 아버지가 없으니 아이를 로카마두르라 부르는 것이며, 아이를 키우기에는 시골로 보내 유모en nourrice를 붙이는 게 낫다라는 말만을 할 뿐이었다. 로카마두르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않고 몇 주고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시기는 언제나 그녀가 리더lieder 가수가 되고자 할 때와 일치하였다. 그러면 우리를 방문한 카우보이cowboy 같은 붉은 색 머리로 피아노 앞에 앉았으며, 마가는 목청껏 휴고 올프의 노래를 불렀으니, 그럴 때마다 이웃방에서는, 플라스틱 구슬을 꿰매던 노게 부인이, 세바스토폴 대로에 내다 팔려던 그녀의 몸이 그 우악스러운 목소리에 벌벌 떨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가가 슈만을 부를 때를 좋아했는데, 그러나 모든 건 그날 저녁에 달의 상태나 우리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아니면 로카마두르가 어떠한지에 달렸으므로, 어쩌다 마가가 로카마두를 떠올리게 되면 노래는 바로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러면 로날도가 홀로 피아노에 앉아,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비밥bebop에 관한 생각을 다듬거나 감미로운 블루스blues로 우리 모두를 끝장내 버렸다.

     나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로카마두르에 관해서는 쓰고 싶지가 않은데, 아마도 나를 중심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모든 것들을 떨쳐내고, 좀 더 나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일이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언제나 내가 뭔 말을 하든 중심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없이 운을 떼곤 하는데, 결국 우리 서양인들의 삶을 질서정연해 보이게끔 하는 기하학 함정에 빠져서는 축이라든지 중심, 존재 이유raison d’être, 옴파로스Omphlos, 인도유럽적 동경 어린 이름들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내가 그토록 묘사해 보려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이 마른 나뭇잎처럼 나부끼는 파리마저도,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두려움과 자루 달린 만남이 배후에서 박동치지 않는 한, 그것들이 우리에게 드러나기란 요원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단어들이, 얼마나 많은 명명들이 조화롭지 못한 하나의 혼란을 위하는가. 나는 때때로 어리석음이란 곧 삼각형을 이름하며, 팔 곱하기 팔은 개새끼이거나 광기임을 납득하다. 마가에게 안긴 채 나는 생각한다, 이처럼 성운을 구체화 시키거나 빵 속으로 인형을 만드는 일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그것은 결코 쓰여지지 않을 소설을 쓴다거나 인민을 구할 이념들을 목숨 받쳐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시계 속 진자가 매 순간 오고감을 완료하고 다시 나를 안정된 범주들 속으로, 의미 없는 인형과 초월적 소설과 영웅적 죽음으로 편입시킨다. 그것들을 나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줄 세운다. 인형, 소설, 영웅주의. 나는 오르테가와 셸러가 그토록 훌륭하게 탐구해 낸 가치들의 위계를 생각해 본다. 미학적인 것, 윤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종교적인 것, 미학적인 것, 윤리적인 것. 윤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미학적인 것. 인형, 소설. 죽음, 인형. 마가의 혀가 나를 간지럽힌다. 로카마두르, 미학, 인형, 마가. 혀, 간지럼, 미학.

 

 

(-116장)

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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