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에 인용해야 해서 번역했다. 1987년 Etienne Gilson-Vrin 판본을 번역본으로 삼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풍습에 관하여서는, 매우 불확실하다고 알고 있는 견해들마저도, 가끔은 의심불가한 것인 양 따를 필요가 있음을 고찰하였고, 이는 위에서 언급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키를 바라였기에, [풍습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는 것은 모두 절대적인 거짓으로서 내던져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런 다음에 나는, 무언가 전적으로 의심불가한 것이 내 믿음 속에 남아 있는지를 보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우리 감각은 종종 우리를 기만하기에, 나는 그 어떠한 사물도, 감각을 통해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인 것은 없다고 가정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추론을 하면서도 잘못 이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심지어는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오류추리를 범하기에, 나 또한 그 어떤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과오를 범할 수 있다 판단하여, 지금까지 증명으로 간주하였던 이성적 논거들을 죄다 거짓으로서 내던져 버렸다. 끝으로, 깨어 있을 때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로 우리 [곁]을 찾아들 수 있고, 그러할 경우 참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기에, 나는 일찍이 정신에 들어온 어떠한 것인들, 내 꿈 속의 환영보다 한결 더 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치부키로 했다. 그러나 그러자 마자, 이처럼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려던 동안에도, 나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생각을 하며, 무언가로 있어야만 함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진리를 발견하였으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는 그토록 확고하고 그토록 확실하기에,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그 어떤 기상천외한 가정으로도 뒤흔들지 못하며, 따라서 나는 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J’avais dès longtemps remarqué que, pour les mœurs, il est besoin quelquefois de suivre des opinions qu’on sait être fort incertaines, tout de même que si elles étaient indubitables, ainsi qu’il a été dit ci-dessus ; mais, pource qu’alors je désirais vaquer seulement à la recherche de la vérité, je pensai qu’il fallait que je fisse tout le contraire, et que je rejetasse, comme absolument faux, tout ce en quoi je pourrais imaginer le mindre doute, afin de voir s’il ne resterait point, après cela, quelque chose en ma créance, qui fût entièrement indubitable. Ainsi, à cause que nos sens nous trompent quelquefois, je voulus supposer qu'il n'y avait aucune chose qui fût telle qu'ils nous la font imaginer. Et pource qu'il y a des hommes qui se méprennent en raisonnant, même touchant les plus simples matières de géométrie, et y font des paralogismes, jugeant que j'étais sujet à faillir autant qu'aucun autre, je rejetai comme fausses toutes les raisons que j'avais prises auparavant pour démonstrations. Et enfin, considérant que toutes les mêmes pensées que nous avons étant éveillés nous peuvent aussi venir quand nous dormons, sans qu'il y en ait aucune pour lors qui soit vraie, je me résolus de feindre que toutes les choses qui m'étaient jamais entrées en l'esprit n'étaient non plus vraies que les illusions de mes songes. Mais aussitôt après je pris garde que, pendant que je voulais ainsi penser que tout était faux, il fallait nécessairement que moi, qui le pensais, fusse quelque chose; Et remarquant que cette vérité, je pense, donc je suis, était si ferme et si assurée, que toutes les plus extravagantes suppositions des Sceptiques n'étaient pas capables de l'ébranler, je jugeai que je pouvais la recevoir sans scrupule pour le premier principe de la Philosophie que je cherch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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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모험 - 앙리 미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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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울 클레의 첫 번째 전시를 봤을 때, 나는 기억하건대, 거대한 적막으로부터 몸을 굽히고 빠져나왔다.

 

  그림에 과문한 나로서는, 거기에서 무엇을 본 것인지, 모르겠다.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쪽으로 이동하여 수족관으로 들어간다는 게, 날카로움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게 너무나도 행복했다.

 

  내가 그림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써야만 했던 사람의 흔적이었으리라. “어떤 예술가인들 작품 안에서 자신을 확립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시공간의 모든 움직임을 [관장하는] — 뇌라고 불리거나 창조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 유기적인 중심이 모든 기능들을 결정짓는 곳이지 않는가?

  나는 음악적인 것에, 독일어로는 조용한 삶이라고도 부르는 진정한 정물에 다다르고 있었다.

 

  자잘한 움직임을 보이는 색체의 전조, 더는 놓여 있기보다는 적재적소에서 발산되거나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마치 희귀한 이끼나 곰팡이 같은 색체들 덕에, 오래된 사물들의 섬세한 톤을 지니고 있는 ‘조용한 자연’은 원숙하고, 나이가 들어 유기적이고 느린 삶에 들어선 듯하며, 또한 점진적인 발현을 통해 세상에 도래한 듯하다.

 

  전체적으로 약음 상태에 있는 가운데, 몇몇 붉은 반점들이 테너가 되어 노래를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느낌은, 어느 지하에 있어, 물 앞에서, 노래에 빠져 들어, 번데기와도 같은 영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선들로 이루어진 복잡다단한 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선들은 먼지와 점들이 이루는 소규모의 집단 사이를 산다. 빵속을 가로지르고, 세포들을, 세포들의 벌판의 윤곽을 그리고, 또는 회전을, 나선형으로 회전함으로써 매료시키고자, 혹은 매료시킨 것을 되찾고자 하는 선들. 미나리들, 마노들.

 

  소요하는 선들.  그렇게 최초의 선들을, 서방에서는, 소요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행하는 선들, 대상을 만들기보다는 주파하는, 여정을 떠나는 선들. (심지어 작가는 화살표를 남겨두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이후 [나이가 들어] 망각하게 되는 문제는, 어려서는 그리는 그림마다 표식을 남기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가기, 집으로 인도하는 길, 방향, , 집 만큼이나 없어서는 안 될 것은 또한 ‘자신’이라는 표식을.

 

  침투하는 선들, 점유하고 있는 선들에 거스르는 선들, 탐욕스레 에두르려는 선들, 둘러싸려는 선들, 형태를 만드는 (그런 다음엔?) 선들, 이는 심층을 위한 선들로, 얼굴의 묘선描線에서가 아니라, 머리 내부에서 요점을 찾고자 하며, 그 곳에서 미지의 눈은 간격을 유지하고 감시한다.

 

  집착을 거스르는 선들, 용기·화분·형태·신체를 본 뜬 산·옷·사물들의 살갗(작가는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에 대한 집착을 거스르는 선들은 추구한다. 부피로부터 멀리, 뭇 중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럼에도 하나의 중심을, 한결 덜 명확한 중심을, 하지만 메커니즘의 주재자에 한결 가까운, 모습을 감추고 있는 매료자를 추구한다. (흥미로운 평행관계가 아닐 수 없는데, 왜인즉 작가는 피부경화증으로 인해 사망했기 때문이다.)

 

  암시적인 선들, 일종의 형이상학을 드러내는 선들은 투명한 대상들과 그 대상들보다 더욱 조밀한 상징들을, 기호-선을, 시의 궤적을, 가장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들며 그러모은다.

 

  광적인 선들, 열거에, 까마득한 병치에, 반복에, 운맞춤에, 무한히 되풀이되는 음표에 광적인 선들은 창조한다. 세포 단위로 증식하는 삶의 미미한 궁궐들을, 무수하고 작은 종루들을, 그리고 다량의 풀들이 자란 작고 단순한 정원 속에서, 영원회귀의 미로를.

 

  하나의 선이 하나의 선과 맞닥뜨린다. 하나의 선이 하나의 선을 피한다. 선들의 모험.

 

  선이 되는, 나아가는 즐거움을 위한 하나의 선, . 점들. 점들이 이루는 (셀 수 없는) 분말. 하나의 선이 꿈꾼다. 여태껏 하나의 선이 꿈꿀 수 있던 적은 없었다.

 

  하나의 선이 기다린다. 하나의 선이 바란다. 하나의 선이 하나의 얼굴을 재고再考한다.

 

  증대의 선들. 개미 수준의 선들, 하지만 단 한번도 개미가 보인 적은 없다. 이 자연의 사원들 속에서 동물은, 그들의 동물성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식물이 환영받는다. 성찰하는 듯한 물고기가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생각하는 선이다. 또 다른 선 하나가 생각을 완수한다. 관건이 되는 선들. 결정을 내리는 선.

 

  하나의 선이 일어난다. 하나의 선이 보러 간다. 굽이치는, 선율의 선이 스무 개의 층상선을 가로지른다.

 

  하나의 선이 움튼다. 주위로는 천 개의 다른 선들, 발아를 담고 있는 선들 : 잔디밭. 사구를 덮는 풀.

  하나의 선이 단념한다. 하나의 선이 휴지한다. 멈춤. 세 개의 징을 사용한 멈춤 : 생육지

 

  하나의 선이 틀어박힌다. 관조. 다시금 줄들이 출발한다, 천천히.

 

  그곳에는 하나의 공유하는 선, 하나의 용마루 선, 더 멀리는 관찰-선.

 

  시간, 시간…

 

  의식의 선이 재형성되었다.

 

  능숙하든 서투르든 선들을 좇을 수 있다, 결코 웅변으로 인도될 위험 없이, 언제나 벗어나, 언제나 절경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언제나 구성 중인 상태로, 언제나 이 세계의 단촐한 구성 요소들의 무산계급에 속하여.

 

  반점의 자매들, 여전히 번지려는 듯이 보이는 반점의 자매들, 그녀들이 유래한 근저로 그는 돌아와 다시금 돌아가고자 한다, 비밀의 장소에, 대지모의 습한 뱃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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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하겠다. 파울 클레는 탈선을 좋아하지 않았을 터다. 그러기엔 너무도 괴테적이다. 측정 가능한 것에 관한 그의 시계적 관심 탓에, 그는 우리가 그를 동반하고자, 그토록 불완전한 평행의 길을 조금이라도 걸으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의 그림 속으로, 그것도 단숨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다행스럽게도, 이 중 어떠한 것도 중요치 않다. 그저 선택 받은 자가 되어, 저 스스로 수수께끼의 세계 속을, 대답 또한 수수께끼가 가장 어울릴 세계 속을 산다는 자각을 유지하였다면 충분하다.

 

 

 

 

AVENTURES DE LIGNES - Henri Mich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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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and je vis la première exposition de tableaux de Paul Klee, j’en revins, je me souviens, voûté d’un grand silence.

 

  Fermé à la peinture, ce que j’y voyais, je ne sais. Je ne tenais pas à le savoir, trop heureux d’être passé de l’autre côté, dans l’aquarium, loin du coupant.

 

  Peut-être y recherchais-je avant tout la marque de celui qui devait écrire : « Quel artiste ne voudrait s’établir là, où le centre organique de tout mouvement dans l’espace et le temps qu’il s’appelle cerveau, ou cœur de la Création détermine toutes les fonctions ? »

  J’accédais au musical, au véritable Stilleben.

 

  Grâce aux mouvantes et menues modulations de ses couleurs, qui ne semblaient pas non plus posées, mais exhalées au bon endroit, ou naturellement enracinées comme mousses ou moisissures rares, ses « natures tranquilles » aux tons fins des vieilles choses, paraissaient mûries, avoir de l’âge et une lente vie organique, être venues au monde par graduelles émanations.

 

  Quelques points rouges chantaient en ténor dans la sourdine générale. Néanmoins on éprouvait qu’on était dans un souterrain, devant des eaux, dans des enchantements, avec l’âme même d’une chrysalide.

 

  Le réseau complexe des lignes apparaissait petit à petit :

 

  Celles qui vivent dans le menu peuple des poussières et des points, traversant des mies, contournant des cellules, des champs de cellules, ou tournant, tournant en spirales pour fasciner, ou pour retrouver ce qui a fasciné, ombellifères et agates.

 

  Celles qui se promènent. Les premières qu’on vît ainsi, en Occident, se promener.

 

  Les voyageuses, celles qui font non pas tant des objets que des trajets, des parcours. (Il y mettait même des flèches.) Ce problème des enfants qu’ils oublient ensuite, qu’ils mettent à cet âge dans tous leurs dessins : le repérage, quitter ici, aller là, la distance, l’orientation, le chemin conduisant à la maison, aussi nécessaire que la maison… était aussi le sien. 

 

  Les pénétrantes, celles qui au rebours des possesseuses, avides d’envelopper, de cerner, faiseuses de formes (et après ?), sont lignes pour l’en dessous, trouvant non dans un trait du visage, mais dans l’intérieur de la tête le point névralgique, où un œil inconnu veille et garde ses distances.

 

  Celles qui, au rebours des maniaques du contenant, vase, forme, mont modelé du corps, vêtements, peau des choses (lui déteste cela), cherchent loin du volume, loin des centres, un centre tout de même, un centre moins évident, mais qui davantage soit le maître du mécanisme, l’enchanteur caché. (Curieux parallélisme, il mourut de sclérodermie.)

           

   Les allusives, celles qui exposent une métaphysique, assemblent des objets transparents et des symboles plus denses que ces objets, lignes-signes, tracé de la poésie, rendant le plus lourd léger.

 

  Les folles d’énumération, de juxtapositions à perte de vue, de répétition, de rimes, de la note indéfiniment reprise, créant palaces microscopiques de la proliférante vie cellulaire, clochetons innombrables et dans un simple jardinet, aux mille herbes, le labyrinthe de l’éternel retour.

 

  Une ligne rencontre une ligne. Une ligne évite une ligne. Aventures de lignes.

 

  Une ligne pour le plaisir d’être ligne, d’aller, ligne. Points. Poudre de points. Une ligne rêve. On n’avait jusque-là jamais laissé rêver une ligne.

 

  Une ligne attend. Une ligne espère. Une ligne repense un visage.

 

  Lignes de croissance. Lignes à hauteur de fourmi, mais on n’y voit jamais de fourmis. Peu d’animaux dans les temples de cette nature, et seulement leur animalité une fois retirée. La plante est préférée. Le poisson à l’air méditant est reçu.

 

  Voici une ligne qui pense. Une autre accomplit une pensée. Lignes d’enjeu. Ligne de décision.

 

   Une ligne s’élève. Une ligne va voir. Sinueuse, une ligne de mélodie traverse vingt lignes de stratification.

           

  Une ligne germe. Mille autres autour d’elle, porteuses de poussées : gazon. Graminées sur la dune.

 

 Une ligne renonce. Une ligne repose. Halte. Une halte à trois crampons : un habitat.

  Une ligne s’enferme. Méditation. Des fils en partent encore, lentement.

 

  Une ligne de partage là, une ligne de faîte, plus loin la ligne-observatoire.

 

  Temps, Temps…

 

  Une ligne de conscience s’est reformée.

 

  On peut les suivre mal ou bien, sans jamais risquer d’être conduit à l’éloquence, toujours évitée, toujours évité le spectaculaire, toujours dans la construction, toujours dans le prolétariat des humbles constituants de ce monde.

 

  Sœurs des taches, de ses taches qui paraissent encore maculatrices, venues du fond, du fond d’où il revient pour y retourner, au lieu du secret, dans le ventre humide de la Terre-Mè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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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 m’arrête. Paul Klee ne devait pas aimer qu’on déraille. Trop goethéen pour cela. Son attention horlogère au mesurable ne lui aurait pas permis d’aimer qu’on fît, pour l’accompagner, un bout de chemin si imparfaitement parallèle.

 

  Pour entrer dans ses tableaux et d’emblée, rien de ceci, heureusement, n’importe. Il suffit d’être l’élu, d’avoir gardé soi-même la conscience de vivre dans un monde d’énigmes, auquel c’est en énigmes aussi qu’il convient le mieux de répond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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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중들이여, 당신들은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아버지에게 들이닥친 병이 무엇인지 알길 바란다면, 이제 좀 입을 다물어라. 왜냐하면 멘붕인 너희들에게 내가 노인의 병을 말해줄 것이기에. 말하자면 어떠한 남자도 엘리아이아 법정의 배심원이 되고 싶은 자는 없다. 왜냐면 그런 사람은 언제나 판결을 내려야 하고, 법정을 좋아하여, 낮에는 법정에 앉아 있고, 밤에는 판결을 꿈꾸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인들은 어느 한 문에다가 ‹ 미남 이호섭 ›이라고쓰고, 이것을 본 다른 사람은 옆에 와서 앉아서는 옆에다가 ‹ 잘생긴 케모스/투표깔때기 ›라고 적는다. 이것을 이제 우리는 크고 많은 그 빗장들을 질러서 그를 지킨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배심원이 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 병을 심각하게 여겼고, 우선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설득하려 시도했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문박에 내보내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 그가 말했다, "무엇을 원인으로(뭣 땜시) 항상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겁니까? 배심원으로 있기를 어째서 멈추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째서 당신 아들을 납득시키지 못하십니까?"

  아버지는 ‹’내보내지 말게끔 설득하는 아들’에 의해 설득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코리반티교의 예식을 전파했다. 아버지는 법정으로 냅다 갔고 북을 치며 판결을 내렸다. 이리하여 내부에 그를 가두고, 그물을 써서 감시했다. 노인의 이름은 필로클레온이고, 그의 아들은 브데뤼크레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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