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제가 오래 읽고 작업한 작가들의 작품을 그와 상응하는 한국 작가의 작품과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저는 평소 문학을 제 작업 외에 딱히 에세이나 공개 장소에서 나불거리며 소모하지 않기에, 저의 문학이 다른 사람들의 문학과 어떻게 다른 지도 조금은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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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편으로부터 › 제3회 - 망년과 송년, 그리고 희망

연말연시는 잘들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올 한 해 많은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살면서 처음으로 여러 사람들 속에서 불화 없이 마냥 즐거웠습니다. 그럼에도 습관 탓인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망년회가 송년회로 바뀌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96년도에 이미 ’퇴폐적인 뜻이 담긴 망년회란 일본식 말을 쓸 것이 아니라 뜻도 맞고 어울리는 송년회’라고 권장을 하고 있습니다.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961207000900

어째서 퇴폐적인지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누군가에겐 한 해를 잊어야 할 망년회여도 좋고, 누군가에겐 한 해를 보낼 송년회여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오래 이어진 속시끄러움을 마침내 잊어버릴 때가 된 것 같아, 좋은 친구들과 망년회 보냈습니다.

새해라는 것에 취해 한국에서는 보신각 종을 울리고, 독일이나 중국에서는 거리거리마다 폭죽을 터뜨리고(코로나 때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습니다), 에펠탑 밑에서 모르는 사람과 부둥켜 않고, 또 누구는 작심삼일이 되기 십상인 새로운 목표나 계획따위를 세워봅니다.

이러한 수작에 원체 관심이 없던 제게 새해는 그저 단어에 지나지 않았는데, 문학을 공부하고 스무 살 즈음부터 지금까지도 한 명의 작가, 루쉰을 떠올리곤 합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동양적 근대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루쉰은 1925년 1월1일에 ’희망’이라는 시를 발표합니다.


희망
루쉰 지음, 최성웅 옮김

내 마음 유달리 쓸쓸하다.
그럼에도 편안한 마음이다. 애증愛憎도 애락哀樂도 없고, 색도 소리도 없다.
아마도 나이가 들었음이라. 내 머리가 벌써 반백半白인 것은 분명 사실이 아니던가, 손이 떨리는 것 또한 분명 사실이 아니던가. 내 넋의 손도 떨릴 것이며, 내 넋의 머리도 반백임이 틀림없다.
물론 이는 여러 해 전부터의 일이다.
내 마음도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을 때 있었다. 피와 쇠, 불꽃과 독, 회복과 복수로. 그러나 순간 이 모든 것들은 텅 비고야 말았다. 덧없는, 자기기만적인 희망으로 메워보려고도 하였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을 방패삼아 덧없이 밀어닥치는 어두운 밤을 거부하려 하였다. 비록 방패 안쪽 또한 텅 빈 어두운 밤일뿐일지라도. 나의 청춘은, 그렇게, 서서히, 소모될 따름이었다.
내 청춘이 지나갔음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몸 바깥의 청춘만은 남아있으리라 믿었다. — 별, 달빛, 빈사瀕死의 나비, 어둠 속의 꽃, 수리부엉이의 불길한 소리, 피를 토하는 두견새, 웃음의 유현幽玄함, 사랑의 난무…… 슬프고, 또 덧없는 청춘이라 할지라도 청춘은 역시 청춘이다.
허나 지금은 어이하여 이다지 쓸쓸한가? 설마 몸 밖의 청춘도 모두 다 사라지고 세상의 청년들이 모두 늙어 버린 탓은 아닐는지?
나는 혼자서 이 텅 빈 어두운 밤에 도전할 수밖에 없다. 나는 희망의 방패를 버리고, 페퇴피 샨도르(1823-49)의 '희망'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여.
          누구에게나 웃음을 팔고 모든 것을 주며,
          그대가 많은 보물-그대의 청춘을 잃었을 때
          그대를 버린다.
이 위대한 서정시인, 헝가리의 애국자가 조국을 위하여 코사크병의 창 끝에 죽은 지 어느덧 75년이 지났다.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더욱 슬픈 것은 그의 시가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애처로운 인생이여! 저 용감무쌍한 페퇴피조차도 마침내 어두운 밤 앞에 발을 멈추고 망망한 동방을 돌아본다. 그는 말한다.—
절망은 허망虛妄이다. 희망이 그러함과 같이.
만약 내가 불명불암不明不暗의 '허망' 속에 목숨을 부지해 갈 수 있다면, 저 지나간 슬프고도 덧없는 청춘을, 비록 내 몸 밖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찾아내리라. 내 몸 밖의 청춘이 한번 소멸하면, 내 몸 안의 황혼도 동시에 시들 터이니.
그러나 지금은 별도 달빛도 없고, 빈사의 나비도 없으며 웃음의 유현함도 사랑의 난무도 없다. 청년들은 평화스럽다.
나는 혼자서 이 텅 빈 어두운 밤에 도전할 수밖에 없다. 비록 내 몸 밖의 청춘을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내 몸 안의 황혼만은 떨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허나, 어두운 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별도 없고, 달빛도 없고, 웃음의 유현함도 사랑의 난무도 없다. 청년들은 평화롭다. 그리고 내 앞에 참된 어두운 밤조차도 없는 것이다.
절망은 허망이다. 희망이 그러함과 같이!

1925년 1월 1일

「희망」이 수록된 루쉰 유일의 산문시집 『들풀』



조금 이야기를 돌려보자면, 한국에서 잠깐 대학에 들어가 시를 읽기 시작하고 2년 정도 지났을 때, 저는당시 한국에서 시집이라는 형태로 나와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접근 가능한 대부분의 책들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연스레, 거창한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저만의 시적 계보 따위를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이어 한국시란 무엇인지, 산문시라는 말이 한국시에 있어 과연 타당한 말인지, 혹은 한국시의 시작을 에워싸고 있는 근대란 무엇인지 등을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시인 타무라 류이치나, 중국의 루쉰 등을 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 있어보이는 척 하는 선생들이 산책자이니 벤야민이니 플라뇌르니 아우슈비츠니 아도르노니 어쩌구 하면서 보들레르나 파울 첼란 등을 거론하는 것에 의문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시 번역이 형편 없지만 당시 한국에 소개된 서양시 번역들을 읽고서 저 사람들은 정말로 저런 어려운 말들을 하며 시를 이해하는 척을 할 만한 지성이 있는가 의아했기 때문입니다.

뭐 그 선생이란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서양시와 달리 문화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가까운 일본과 중국 작가의 작품은 언어의 한계를 너머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3달 정도 중국을 유랑하기 전에 6개월 정도 매일 새벽 시사차이나학원이라는 곳에서 중국어를 배웠고, 어느 정도 중국어로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루쉰을 읽었습니다.

루쉰의 책을 원서로 구입하고, 기존 번역문을 옆에다 펼쳐 두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번역이라기보다는 윤문 정도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제게는 생전 처음으로 했던 번역 작업이었고, 그 결과물이 위에 소개한 「희망」이라는 시입니다.

당시에도 지금도 루쉰의 문학이나 당시의 배경 따위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다라는 것, 그것이 막막한 근대라는 점은 통감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그리 루쉰을 좋아하지도, 김광석의 노래를 자주 듣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새해가 올 때면 여전히 루쉰의 「희망」이 생각납니다.

그는 페퇴피 샨도르의 시가 아직도 죽지 않은 것에 슬퍼하지만, 그런 그의 시를 읽으며, 저는 그가 느낀 절망과 허망과 희망이 여전히 제게 진행형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루쉰을 포함한 다른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에 참가하고 싶으신 분은 위에서 알린 ‹ 작가와 작가 읽기 ›에 참여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vasistas
,

 

<공지>

15일부터 매주 금요일 20시에 5회 간 「작가와 작가 읽기」라는 이름으로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제가 오래 읽고 작업한 작가들의 작품을 그와 상응하는 한국 작가의 작품과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저는 평소 문학을 제 작업 외에 딱히 에세이나 공개 장소에서 나불거리며 소모하지 않기에, 저의 문학이 다른 사람들의 문학과 어떻게 다른 지도 조금은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제 인스타를 확인 바랍니다: @traducteur_etudi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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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성웅입니다.

 

공사가 다망하여 그간 격조했습니다.

바쁜 와중에서도 ‹ 저편으로부터의 두 번째를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했는데, 어제 제가 어쩌다 보니 기획하여 시작된 부쟁고 야회에서 우노 쿠니이치 선생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제를 정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들뢰즈의 제자이자 질 들뢰즈 및 앙토냉 아르토 전공자로 유명한 선생님인데, 선생님 관련 잡담은 인스타 피드백을 확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노 쿠니이치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시인 요시오카 미노루와 암흑무도의 창시자 히지카타 타츠미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둘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다른 두 명의 작가를 거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 작가 장 주네(1910-1986)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미시마 유키오(1925-1970)입니다.

 

장 주네

기존의 장르와 권위 속에서 비롯하는 대부분의 시시한 문학 혹은 문학인과 달리, 장 주네는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창부였던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10세 때는 굶주린 배를 억제하지 못하고, 애정에 굶주려 절도죄로 감화원에 들어갑니다. 그 후 주네는 탈옥하여 거지, 도둑, 남창, 죄수로 생활을 하며 유럽 전역을 방황합니다. 1942년 독일 점령기에 투옥되었을 때에는 그의 나이 서른두 살로, 그때 그는 처녀작 《꽃의 노트르담》과 자서전 성격이 강한 《도둑일기》를 썼습니다.(《장미의 기적》은 이로부터 2년 뒤 세상에 나옵니다.)

 

이러한 장 주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일본의 작가가 있었으니,바로 미시마 유키오입니다. 장 주네와 달리 왕족과 귀족 도련님들이 다니던, (사족이긴 하지만 제가 석사 학위를 받은 곳이기도 한) 가쿠슈인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되레 장 주네에게 더욱 끌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초가 되기 전 유약한 미시마

미시마 유키오는 장 주네의 《도둑일기》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평을 쓰기도 했습니다 :

“(주네는) 경력만으로도 굉장하지만, 괴물 작가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 만이 아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남색·도둑질·배신의 세계를 그리면서 그것을 거룩한 높이에 올리려고 했다. ,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장 주네에 대한 독서 편력은 미시마 유키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적어도 자기 개조 이후 금각사를 쓰기 전까지, 나약한 다자이 오사무가 죽은 다음 그는 못 생겼으니 기계체조와 냉수마찰이나 했으면 좋았다는 신랄한 글을 쓰기 전까지, 그러니까 동성애가 주제로 나오는 《가면의 고백》과 《금색》에 이르기까지는 주된 참고 작가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장 주네와 미시마 유키오의 영향 아래에서 한 명의 무도가와 한 명의 시인이 탄생합니다. 서양의 전위前衛를 답습하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하는, 서구와 비서구의 위치를 뒤집어 엎는 전위顚位로서의 예술, 전위로서의 문학을 탄생킵니다. 다름 아닌 히지카타 타츠미(1928-1986)와 요시오카 미노루(1919-1990)가 말이지요.

히지카타 타츠미에 대해서는 전공자이자 유일하게 한국어로도 작업한 이재인 님의 논문에서 몇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이재인 님의 두 편의 논문도 첨부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보면 좋겠습니다. :

 

히지카타 타츠미는 독일의 현대 무용을 전공한 에구치 타카야의 제자인, 마쓰무라 카츠코가 아키타시에 연 현대무용 연구소에서 독일계 현대무용을 배우는 것으로 무용을 시작하였다.”

 

이후 (...) 1959, 드디어 암 흑부토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킨지키(禁色)>를 발표하게 되었다. <킨지키> 는 미시마 유키오의 동명 소설 《금색》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된 작품으로서, 동성애의 테마나 , 남색적인 움직임, 암전을 사용한 조명 등 무대 위의 모든 연출이 당시의 일본의 현대무용계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었으며, 매우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일본 무용계로부터 보기에 무용으로서 인정하기 어려운 무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엄격한 일본의 무용계로부터는 혹평을 받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당시의 일본의 전위 미술가나 미술 평론가들, 문학가들로부터는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성공했다. 히지카타의 작품에 주목하였던 당시의 저명한 문학가들 중 한 명이, 부토 작품 <킨지키>의 모티프가 되었던 소설 《금색》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였다. 미시마는 히지카타의 부토 작품 <킨지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의 글을 남겼다.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육체의 돌연의 움직임, 돌연의 고함 같은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기대에 거의 응답하지 않고, 우리들의 목적의식에 끊임없이 정묘하게 외면하기 때문이다. (...) 춤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그 시간적 계속을 보증하는 것이, 음악이 아니라, 단지 몇 개의, 반 자각적이고 반 몽환적인 땀에 젖은 육체라고 하는 것은, 무용이라고 하는 것이, 육체에 대해 부과하고 있는 순수성의 의미 그 자체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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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히지카타 타츠미에 빠지게 된 것은 이재인 님의 논문 때문도, 우노 쿠니이치 선생님의 저서 《히지카타 타츠미 쇠약체의 사상》 때문도, 미시마 유키오 때문도 아닌 한 시인으로부터였습니다.

 

저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일본어로 일본현대시를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혹시 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일본어로 참여하고 싶으신 분은 따로 연락주셔도 좋습니다.)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을 멋대로 끌어들여 진행하는 모임이라 동경대의 학생부터 선생까지 주로 모이고, 그 외에도 중국인 유학생과 한국인 친구들도 참여해 적당히 한중일 3국의 평화(?)를 도모하고 있는 모임입니다.

 

일본에 온 지 3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현대시를 읽어나가고 있는데, 학교 수업에서는 근대시까지만 다루기에, 현대시를 읽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너무 부담이 되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참가하기가 힘들기에, 일주일에 한 번, 한 시인의 작품 2-3편 정도만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매번 돌아가며 누군가 한 명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작품을 선정해야 하고, 그 사람의 안목을 바탕으로 문학전공자들이 토론을 하기에, 나름의 쫄깃함도 있고 재밌는 시간입니다.

 

이 모임에서 몇 주 전에 알프레드 자리 연구자인 사와라 상이 고른 작품이 바로 요시오카 미노루의 시였습니다. 평소에도 진지 그 자체인 사람이고, 시평론으로도 상을 받았던 사람이기에, 어떤 시를 가져올까 궁금했는데, 놀랄 정도로 묵직한 다음 두 편의 시를 가져왔습니다. (다 보여주긴 좀 길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여, 한 편만 소개후 다른 한 편은 다른 곳에서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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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안마 어휘편

요시오카 미노루 지음, 최성웅 옮김

 

1

나는 보았다!

어스름한 남동 방향을 목표하여

한 노파가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의 끝

그 높이까지

수면은 솟아오른다

그 수면이 이윽고 수평이 됐을 때면

옛 마을잔치 같은

그리운 느낌이 든다

수상한 냄새 뒤가 구림

구체성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금가루 흩날리고

우아한 목숨이 끊어질 듯한 일몰의

관념의 틀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관절의 평야로

언어로부터 부토로 그리고 풍경을 바꿔서

‘젖먹이 아이의 뺨에 가 닿는다

그물코로부터

나는 무엇을 들여다보면 좋은가

상인방上引枋의 먼지

잘록한 가지 꽁무니

낙지 빨판이 빨아낸 것

또는 추상화된 선

사랑’

기물과 한 패가 되기

를 끝마치고자

‘나는 침상에 만주를 끌어들인다’

 

2

옛부터

큰 톱이 있었으니

몽둥이에 감겨

있는 천이나 붉은 실 있었으니

불 붙은 어미의 반백발 좋아

풀솜으로 폭신하게 둘러쌓인 언니의 발 더듬어

‘위에 가면 정령 아래에 있는 것

이 인형’

그리고

어찌할 할 도리가 없는

‘한 패인 것이 육체’

이윽고 동틀 녘

‘밥 먹고 뒷문으로 빠져나오는 듯한 것이 혹은 도호쿠본선

그래서 메밀국수집의 열한 번째 막내는

사탕 말고

‘재래식 변기 앞대가리에 이빨을 들이민다’

밤은 단조롭기에 탐미적이다

생강을 갈듯

창문살 엮는 장인의 노랫소리 들린다

 

3

‘치조농루를 앓는 아빠가 엄마의 기저귀를

씻고 있는 강가에서 형이 돌을

들어올리면

공처럼 둥글게 변하는 곤충이 있다’

몸을 작게 만들기

‘사물의 울타리 속에서 몸의 길이를 잰다’

이것이 이른바 가仮매장

나무젓가락을 둘로 가르며

연옥부토의 그림을 생각한다

나는 물벌레 사람

강물에 떠내려가는 수박을

죽은 자와 함께 먹는다

한밤중 천연두 투성이의 인물은 누구인가?

김이 나온다

덧문짝에 몸이 얹힌 채

연어 머리를 갉아 먹는 남자가 보인다

염천 아래에서

오돌토돌한 오이가 자라난다

종교화 마냥

 

4

장화를 신은 채로

새신부는 돌아온다

절연애자와 눈의 세계로부터

뚝뚝 나를 낳기 위하여

벽장 안으로 들어간다

‘움직이지 않는 것과 움직이고 있는

것 반반’

나는 몸 성히 태어날 것인가?

‘성스러운 각도를 더듬는 자’

가 되려는

왜인지 무서운

애를 떼기 위한 약 끓는 소리다

마대를 뒤집어 쓴 말이 일어나고 일어나

혼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재단과 재의 바닥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형식이 아니던가

‘물고기의 부레를 철썩 짓이긴다’

할 정도로 자연 그 자체다

나의 꿈꾸는 연골에 필요한 것은

사물의 발정과 콜타르의 악취다

다시 살아난다는 유머도 곁들여

‘쇠뜨기를 씹는 노인의 턱을 빼면

불이 뿜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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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는 요시오카 미노루의 후기 시집 중 첫 시집으로 거론되는 《사프란 따기》(1976)에 등재된 작품입니다.

 

전기 시는 어둡고 조금은 불쾌한 풍경을, 오브제를 묘사하였고, 개중에 제가 한국에 소개했던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과 마찬가지로 H씨 상을 수상한 《승려》(1958)이 가장 널리 알려진 시집입니다.

 

저는 아직 《승려》를 꼼꼼히 읽어본 적이 없지만, 《사프란 따기》에 나온 시들은 제가 일본에서 읽은 모든 시들보다 매력적이었습니다.

 

모임에서 곧장 일본어로 읽으면서 토론하기는 힘들기에, 미리 번역을 해가는데, 요시오카의 문체 자체에 빠져버렸고, 이후 토론을 하면서 더 재밌는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요시오카 미노루의 후기 시 특징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시를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말이라 하면 정말로 소리 내어 내뱉어진 , 어설픈 책상물림의 지적 인용과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저는 요시오카 미노루를 읽으며 장정일의 천둥벌거숭이성과 황지우의 교활함을 동시에 느꼈는데, 그는 실제로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이후 상업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중퇴를 한 게 학력의 전부인 시인이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요즘의 한국은 다른 이유로 아니지만) 작가입네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이 대부분 고학력자인 곳에서, 장 주네와 마찬가지로, 장정일과 마찬가지로, 요시오카 미노루의 언어에 거침도 한계도 없을 것만 같은 동물적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착각이라 치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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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문학이 되는 장소는 어디 쯤일까요? 저는 요새 한국에서 과연 근대문학이 성립하였는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문학은 문학이라는 단어 자체도 번역어로서 성립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근본적으로 서구적이고, 근본적으로 제국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런 문학을 넘어 문학을 한다는 것이 과연 적당히 다름과 평등과 다양과 소수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으로 가능한지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일본 근대 문학의 성립이 제게 있어서는 자신들만의 장르의 구축과 긴밀한 연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엉터리 방터리일지언정 프랑스 자연주의를 습득하려 했고, 그 결과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소설이라는 장르를 창출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필사적으로 서양을 따라잡으려던 노력에서, 서양의 언어를 받아들이려는 절박함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리 오가이 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모리 오가이의 독일어 노트, 일본어에 앞서 문학은 서양어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어로 시를 썼던 니시와키 준자부로 등, 아직 사전도 학습 자료도 미비했던 시절에 모국어의 한계를 넘어 괴물 같은 언어를 구사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들여오려고 했던 문학이, 번역이 있었기에 일본의 아방가르드는 단순한 번역어로서의 전위前衛가 아닌 전위顚位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결과로 오히려 (한국을 빼고?) 전 세계로 역수입된 히지타카 타츠미의 암흑무도와 요시오카 미노루의 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일본 문학의 한 장소이지 않을까, 이것이 저의 요즘 생각입니다.

 

조금 더 쓰고 싶지만 피곤해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문학에 관한 이러한 잡담이 듣고 싶다면 위에서 공지한 「작가와 작가 읽기」에 부디 참가 바랍니다. 5회만이 아니고, 다른 분야의 재밌난 분들을 섭외했는데, 사람이 없으면 그냥 끝내야 해서 좀 아쉬운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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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타츠미 관련 이재인님 논문:

히지카타타츠미_이재인.pdf
2.67MB
히지카타타츠미2_이재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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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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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저편으로부터 ›는 제가 태어난 한국의 바깥 편에서, 혹은 제게 모국어로 주어진 한국어의 바깥 편에서 생활하고 경험하는 것들을 비정기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글입니다.

때로는 제가 번역한 한 편의 시를 별 다른 소개 없이 전달할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곳을 떠돌며 만난 사람들이나 풍경들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이른바 잡문이니 읽고 싶은 만큼 읽고 넘기면 되겠습니다.

현재 도쿄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고 번역을 하고 있는데, 번역은 돈이 안 되는 데다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계속 언어 수업을 하고 있어 정기적으로 보내지는 못하니 이점 혜량 바랍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시작반을 개강합니다. 단체 수업으로 4회 기준 10만원 내외이니 관심있는 분은 연락바랍니다.
독어1팀 : 화21-23(12월5일시작), 독어2팀 : 일14-16(11월26일시작)
불어2팀 : 토9-11시(12월23일시작), 불어3팀 : 수20-22(12월6일시작)

또한 외국어로 문학작품 읽기 모임(수요일 22-24시)도 무료로 진행하고 있으니 참가 희망하시는 분 환영합니다.

‹ 저편으로부터 › 구독신청(다른 분께 추천 시) : https://forms.gle/286TStSvpqtjGUHa6
sns 링크 : https://linktr.ee/mon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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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성웅입니다.
문학통신 ‹ 저편으로부터 ›의 첫 글을 보내드립니다.

우선 처음이니 만큼 ‹ 저편으로부터 ›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번역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

‹ 저편으로부터 ›는 제가 4년 넘게 번역 중인 아르헨티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의 제1부 제목입니다. 코르타사르는 제가 에콰도르에 살 때 문학을 하던 친구에게 처음 들어 알게 된 작가로, 이후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읽고 번역하기로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

코르타사르가 누구인지 모르실 분이 많을 텐데요, 그는 세계문학을 통틀어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선 꽤나 인기를 얻은 로베르트 볼라뇨도 스페인어권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세르반테스, 보르헤스, 코르타사르를 꼽은 바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왕성하게 번역되는 작가이지만 한국에서는 눈 밝은 이가 적은 탓인지 아직 단편 선집 한 권 정도만 나왔을 뿐입니다. 특히나 코르타사르를 코르타사르이게끔 해주는 그의 대표작 『팔방치기』는 이제서야 제가 번역해서, 아마 책으로 나오기까지 1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코르타사르는 1914년 불어권인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고,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를 거쳐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고, 네 살 때 조국인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에 살며 병약했던 어린 시절, 집 바깥에서는 스페인어로 생활했지만 집 안에 돌아오면 프랑스 사전을 탐독하고, 쥘 베른을, 빅토르 위고를, 에드거 앨런 포를 읽었습니다.

1951년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에 대한 반대 표명으로 교직을 관두고 파리로 이주를 했고, 프랑스에서는 유네스코 공식 번역가로 영어 및 프랑스어 문서들을 번역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1963년, 49세에 출간한 『팔방치기』는 라틴 아메리카 붐을 주도하는 작품으로서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팔방치기』는 여러 의미로 복잡한, 아니 혼잡한 작품인데, 이것은 위에 말씀드린 것 같이 문학과 언어에 대한 작가의 편력에서 기인합니다.

제1부 ‹ 저편으로부터 ›의 배경은 파리고, 제2부 ‹ 이편으로부터 ›는 남미의 파리라 불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배경이 되어 일종의 데칼코마니를 이룹니다. 그리고 제3부 ‹ 다른 편들로부터 ›는 어느 곳에서 속하지 않는 공상의 공간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품에서는 장소만이 아니라 언어도 뒤섞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스페인어로 쓰여졌지만, 특히 제1부 파리에서는 작중 인물들이 구사하는 프랑스어가 아무런 주석도 없이 나오며, 그 외에도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희랍어마저도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스페인어라고 말했지만, 코르타사르가 구사하는 스페인어는 어디까지나 아르헨티나어입니다. 아르헨티나어는 스페인어 외에도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스페인어를 쓰는 국가 중에 어휘나 음악성에 있어 가장 독특합니다. 

작가 스스로도 번역을 할 때에는 공식적인 스페인어로 번역하지만, 자신의 글을 쓸 때에는 아르헨티나어로 쓴다고 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아르헨티나어에서 기인하는, 그리고 저 자신의 독특한 언어 학습으로부터 기인하는 혼잡성은 쉽게 언어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문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재즈가 작품 전체를 관통합니다. ‘재즈란 좋거나 나쁜 것, hot하거나 cool한 것, 희거나 검은 것, 고전적이거나 현대적인 것, 시카고나 뉴올리언스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그러한 재즈는 파리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처럼, 프랑스어와 아르헨티나어처럼, 책의 독자에게 ‘정반합의 구타’를 흠씬 선사합니다.

이러한 혼잡과 더불어 작가는 물리적으로는 한 권일 뿐일 책을 여러 권의 책으로 존재하게 만듭니다. 서문에서 작가는 책의 사용법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 이 책은 각자의 방식에 따라 복수複數의 책으로, 특히 두 권의 책으로 성립 가능하다. 독자에게는 다음 두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 읽기를 권한다 :
제1의 책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읽어나가며, 결말이라는 단어와 등가인 별 세 개가 찬란히 발치를 비추는 56장에서 끝이 난다.
제2의 책은 73장에서 시작하고 각 장 발치에 적힌 순서를 따라 읽는다.»

총 3부 155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저는 4년 전부터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일본어로 읽으며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즐겁게도, 이 책의 번역들은 상당히 훌륭한 수준입니다.

 



영어 번역가는 작가의 친구이자,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들어 준 그레고리 라바사입니다. 그의 번역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현재 나온 일본어 번역은 영역을 중역해서 오래전에 나왔습니다. (현재는 제가 참가하는 보르헤스 연구회에 나오는 메이지 대학의 우치다 선생님께서 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불어 번역은 상대적으로 세밀하지는 못하지만 문학적인 문체로 프랑스어권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으며, 독어 번역은 가장 정밀함을 자랑합니다.

벌써 1년 넘게 매주 수요일 저녁 수요윤독회에서 해당 작품을 다른 분들과 읽고 있습니다. 원어인 스페인어가 됐든, 번역어인 불어/독어/영어/일어가 됐든, 작품을 이해하고 싶은 분들고 함께 더듬어 나가며 작품에 대한 번역도 점점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번역하면 총 600페이지는 거뜬히 넘을 상당히 두꺼운 책으로 현재는 절반 이상 작업이 끝났고, 내년 말까지는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꾸준히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 저편으로부터 › ‹ 이편 ›에 있는 친구들에게 제가 읽고 경험한 것들이 조금은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2.
여기서부터는 『팔방치기』의 번역에 관련한 이야기이니, 번역 및 출판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넘기셔도 될 듯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22일)부터 수요윤독회가 다시 시작하는데, 이전 윤독회에서는 상기한 ’제1의 책’을 읽기 위해, 1장부터 56장까지(1-2부)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제2의 책’으로서 작품을 함께 읽어나가기로 해서, ’제2의 책’의 처음인 73장 번역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매주 참가자 중 한 분이 자신이 가능한 언어로 2페이지 정도 번역을 하면,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불행히도 다행히도 너무도 코르타사르적인, 너무도 재즈적인 문장으로 시작해 번역에 참가한 분도 상당히 난감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번역에 참가한 분은 대학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또 부업으로 출판 편집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언어에 익숙하고, 또 편집자이니만큼 번역문을 다루는 데에도 민감한 분입니다.

그런데도 실제 직접 번역을 할 경우 생기는 문제들이 참가자 분의 번역에서 또렷이 드러나기에 이를 두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물론 이 분의 경우는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고 학습을 위한 번역이니 이 점은 감안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참가자 분과 제가 한 번역, 그리고 원문과 다른 번역문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한국어 번역a
그렇다, 하지만 해질녘, 무너져 보이는 현관으로부터, 작은 출입구에서 나와 유쉐뜨 가로 질주하는 어둡고 고요한 불빛과, 돌을 데워 문간 공간에서 매복하고 있는 정체 없는 우리의 불빛을 누가 달래 줄 것인가? 시간이나 추억, 우리를 이쪽으로 속박하는 끈끈한 것과 연계되어, 우리의 내부에 지속적으로 둥지를 트고, 우리가 재가 될 때까지 감미롭게 타오를 이 달짝지근한 연소를 어떻게 정화하면 될 것인가?

한국어 번역b
그렇다, 하지만 대관절 그 누가 우리를 치료할 수 있어 귀 먹은 불로부터, 좀 먹은 현관과 좁다란 마당을 뛰쳐나와 해질녘 위셰트 가街를 내지르는 무색의 불로부터, 돌들을 할짝대거나 문짝의 공허에 도사리는 무상無像의 불로부터 벗어나게 한단 말인가, 우리 어떻게 해야 감미로운 연소로부터 몸을 씻어 이것의 추격을, 둥지를 틀고 계속해서 시간과 기억 및  끈덕지게 우리를 이편에 붙들어매는 뭇 실질과의 연맹을, 그리고 달콤한 불에 타 종국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리고야 마는 결말을, 뿌리칠 수 있단 말인가. 

원문
Sí, pero quién nos curará del fuego sordo, del fuego sin color que corre al anochecer por la rue de la Huchette, saliendo de los portales carcomidos, de los parvos zaguanes, del fuego sin imagen que lame las piedras y acecha en los vanos de las puertas, cómo haremos para lavarnos de su quemadura dulce que prosigue, que se aposenta para durar aliada al tiempo y al recuerdo, a las sustancias pegajosas que nos retienen de este lado, y que nos arderá dulcemente hasta calcinarnos.

영어 번역
YES, but who will cure us of the dull fire, the colorless fire that at nightfall runs along the Rue de la Huchette, emerging from the crumbling doorways, from the little entranceways, of the image-less fire that licks the stones and lies in wait in doorways, how shall we cleanse ourselves of the sweet burning that comes after, that nests in us forever allied with time and memory, with sticky things that hold us here on this side, and which will burn sweetly in us until we have been left in ashes.

독일어 번역
Ja, aber wer wird uns heilen von dem tauben Feuer, dem Feuer ohne Farbe, das durch die Rue de la Hechtete läuft, wenn es Nacht wird, aus morschen Portalen Schlägt, aus den kleinen Innenhöfen hervorkommt, von dem bildlosen Feuer, das über Steine leckt und auf den Türschwellen lauert, was sollen wir tun, um sein sanftes Brennen abzuwaschen, das uns verfolgt, das sich festsetzt, um zu dauern, verbündet mit der Zeit und der Erinnerung, den haftenden Substanzen, die uns auf dieser Seite festhalten, von diesem sanften Brennen, das anhalten wird, bis es uns ausgeglüht hat.

프랑스어 번역
Oui, mais qui nous guérira du feu caché, du feu sans couleur qui, à la nuit tombante, court dans la rue de la Huchette, sort des portails vermoulus, des étroits couloirs, du feu implacable qui lèche les pierres et guette sur le pas des portes, comment ferons-nous pour nous laver de sa brûlure douce qui se prolonge, qui s’installe pour durer, alliée du temps et du souvenir, des substances poisseuses qui nous retirent de ce côté-ci, et qui lentement nous consumera jusqu’à nous calciner ?

일본어 번역
そうだ、しかし誰がぼくらの音たてぬ火を癒してくれるだろうか、夕暮に、崩れかけた表玄関から、小さな出入口から出て、ユシェット通りを突っ走る色のない火、石を舐め、戸口の空間に待ち伏せている姿なき火を。いつまでも続く快美な燃焼をどのように浄化したらいいのか、時問や思い出と結託し、われわれをこちら側にとどめさせるべとべとしたものと結託して、われわれの内部に居座りつづけ、われわれを灰になるまで甘美にも焼きつくすこの快美な燃焼を?


상당히 길지만 단 하나의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요? 여기에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만, 다만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인지, 그 문체란 어떠한 것인지, 그것을 어떤 독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하는지에 따라 전략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선 같은 인도유럽어권인 불어, 독어, 영어의 경우는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처리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영어의 중역인 일본어의 경우는 두 문장으로 처리했고, 한국어a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장이 2개의 의문부사quién(who)과 cómo(how)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으니, 크게는 두 문장으로 나열로 볼 수 있고, 문장이 너무 길어지면 감당하기 힘들어서 일본어와 한국어a에서는 두 문장으로 나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작품에 대해서 설명했던 것처럼, 작품의 문체에는 술과 재즈에 취해, 온갖 언어와 문법이 섞여들면서도 좀 체 버릴 수 없는 이성이 번득이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복잡한 문장을 여러 개의 단문장으로 나눌 수 있지만, 코르타사르의 문체 혹은 문학성을 생각했을 때에는 조금 미묘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마냥 문장을 똑같이 한 문장으로 만들려다 보면 한국어와 근본적으로 다른 통사적 특징 때문에 이른바 ’과호흡’이 오게 됩니다. 

유럽어에서는 주어 + 동사 + 목적어 순으로 문장을 던지기 쉬운 반면, 한국어는 주어 + 목적어 + 동사 순이 이해하기가 편하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럽어에 경우 어떤 동작이 있을 지를 명확히 말한 다음, 그 동작에 걸리는 목적어를 상당히 길게 펼치는데, 이를 일반적인 한국어 순으로 옮기면 앞에 나열하는 것들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른 채로 읽게 되어 점점 숨이 막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문장 전반부의 통사를 파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Sí, pero quién(주어) nos(직목) curará(동사) del fuego sordo(간목1), del fuego sin color que corre al anochecer por la rue de la Huchette, saliendo de los portales carcomidos, de los parvos zaguanes(간목2), del fuego sin imagen que lame las piedras y acecha en los vanos de las puertas(간목3),

이에 대한 한국어번역a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렇다, 하지만 해질녘, 무너져 보이는 현관으로부터, 작은 출입구에서 나와 유쉐뜨 가로 질주하는 어둡고 고요한 불빛과(간목1+2), 돌을 데워 문간 공간에서 매복하고 있는 정체 없는(간목3) 우리(직목)의 불빛을 누가(주어) 달래 줄(동사) 것인가?

여기서 참가자의 번역은 너무 길어지는 목적어가 버거웠는지 목적어들을 압축(?)시킵니다. 그 결과 무언가 문학적이지만, 작가가 문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섬세한 것들이 지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의 번역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
그렇다, 하지만 대관절 그 누가(주어) 우리를(직목) 치료할 수 있어(동사1) 귀 먹은 불로부터(간목1), 좀 먹은 현관과 좁다란 마당을 뛰쳐나와 해질녘 위셰트 가街를 내지르는 무색의 불로부터(간목2), 돌들을 할짝대거나 문짝의 공허에 도사리는 무상無像의 불로부터(간목3) 벗어나게 한단 말인가(동사2)

여기에는 몇 가지 궁리가 있습니다. 
1. 우선 원문의 순서를 전달하기 위해 동사를 둘로 쪼갰습니다. ’누구를 병으로부터 치료하다curar’라는 동사를 ’치료’하여 그 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다’로 나누어 줌으로써 기다란 목적어로 인해 숨이 막히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2. 문장의 구조를 이해하기 쉽게 ’대관절’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의문문임을 드러냈고, 간접목적어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소리로서도 명확하게 파악하게 전부 -부터로 처리했습니다.
3. ’좁다란 마당을 뛰쳐나와’ 부분도 ’마당으로부터’로 쓰면 간접목적어와 혼동할 수 있기에 부러 다른 조사를 활용했습니다.
4. sin imagen부분은 이미지, 혹은 상像이 없다는 말인데, 이 부분을 참가자 분은 ’정체 없는’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작품 전체에서 영상imagen과  형상figura의 대립이 중요시 되기에, 해당 부분을 의역하지 않고, 또 문장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으면서도 음악성을 살리기 위해 무색(sin color)과 함께 읽을 수 있게 무상無像이라고 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고 한자를 병기했습니다.

문장의 후반부는 좀 더 복잡한 공정들이 들어가 있어 설명이 더욱 난해해 질 것 같아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결국 이 한 문장을 문학적으로 번역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제 경우는 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여러 통번역을 해 왔지만, 결국 취향과 가치관 탓에 결국 저는 가장 돈이 안 되고 가장 어려운 작품들만을 골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몇 해 전부터 제가 행하는 번역은 그저 제 돈과 시간을 들여서 하는 취미 활동일 뿐이라고 마음먹기로 했습니다. 이후로 번역할 작품은 시간이 적게 드는 간단한 작품이 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하였고, 생계는 언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취미 활동이면 좀 더 건강했으면 좋겠지만, 잘못 타고나서 그런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취미 활동이란 게 있다는 것이 어찌보면 즐거운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참고로 코르타사르는 1984년에 죽었고, 전 198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문체는 제가 지금껏 작업한 어떠한 작가보다도 여러 모로 저와 일치하기도 해서, 멋대로 제가 코르타사르의 환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 저편으로부터 › 제1회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엔 좀 더 가벼운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를 읽는 수요윤독회에 참가하시고 싶으신 분들은 언제든 연락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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