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통신 '저편으로부터' 제8회 시작에 앞서, '옮김과 들임'에서 주최하는 무료 독일어・희랍어 수업에 대해 알립니다.

다가오는 10월부터 독일어와 고전 그리스어 문법을 개괄하기 위한 수업을 진행합니다.
독일어 수업은 저 최성웅이, 희랍어 수업은 제 친구이자 희랍어 선생 이호섭이 담당합니다. 별도의 수업료는 없습니다. 다만 후원금을 통해 운영되는 만큼, 여유가 있으시다면 모임의 지속 및 차후 강의 등의 활동을 위해서 힘을 보태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수업을 신청하고 싶으시거나 '옮김과 들임'의 활동에 관심 있으신 분은 홈페이지(monvasistas.com)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릴케의 『두이노 비가』 정독 모임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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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으로부터' 제8회 — 이쪽에 묶여 저쪽을 부르짖기

有人在此岸身被重繫,空喚彼岸言:『來渡我去。』
- 『불설장아함경』 16권 중에서

 

 

요 며칠 피안彼岸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피안화彼岸花를 찾아 쏘다녔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한국의 '백중절'이나 멕시코의 '망자亡者의 날el día de los muertos'처럼, 일본에는 오히간お彼岸이있습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과 추분 각각 일주일 동안이 이에 해당되며, 봄의 오히간에는 보타모찌를, 가을 오히간에는 오하기를 먹습니다.

 

 

보타모찌牡丹餅와 오하기お萩는 멥쌀과 찹쌀을 섞어 찐 것을 팥앙금에 묻힌 떡으로, 계절에 따라 달리 부를 뿐 실상 같은 음식입니다. 씹히는 쌀이 제맛인 떡에 팥앙금 대신 흑임자나 콩가루 등을 묻혀 팔기도 하는데, 봄과 가을에 각각 피어나는 모란牡丹과 싸리萩 꽃을 팥 알갱이에 비유해 보통은 팥떡을 떠올립니다.

오히간お彼岸은 피안彼岸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불교의 영향으로 헤이안 시대부터 계속된 명절입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 춘추분에 이승此岸과 저승彼岸의 거리도 가장 짧아진다고 생각하 조상을 기리는 날로 삼았다 합니다.

일본에 온 지 4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크게 신경쓰지 않은 날이었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한 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만주사화曼珠沙華, 한국에서는 꽃무릇이라고 불리우며, 구근식물로 비늘줄기의 외형이 마늘과 비슷 석산石蒜 혹은 돌마늘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 꽃의 이름은 히간바나彼岸花, 그 이름 때문인지 섬찍할 정도로 붉은 색 때문인지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이 꽃을 자세히 보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올해의 추분은 어제 9월22일이었고, 앞뒤 3일을 포함한 일주가 오히간이었기에, 그 첫 날인 19일부터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디선가 보였던 것 같은데, 막상 배회하다 보니 볼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지 낮에는 36도까지 기온이 올라갔고, 더위 속에서 몸과 마음이 증발해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를 공치고서 돌아오는 길에 몇몇 꽃집에 들려도 일반적으로 취급하지 않는 꽃이라는 말을 들었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니 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인 20일에도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고, 여름은 여전히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무엇에 홀렸는지 어떻게든 보고 싶다는 마음에 동네 돌아다녔습니다.
다섯 시면 절은 문을 닫기에 그 전에 찾아봐야 했고, 땡볕 아래를 돌아다니느라 피부 거죽을 타들어가고 일사병인지 머리는 멍해져 갔습니다. 머리 속에서는 피안彼岸이 무엇이지 차안此岸은 또 무엇인지, 이곳과 저곳은 무엇이며, 지시형용사들은 어떻게 태동하였는지 등등의 생각이 어지럽고도 모호하게 떠돌았습니다.

 

 

한 절의 묘지를 관리하시는 분이 올 해는 늦더위로 아직 히간바나가 피지 않은 것 같다고, 그래도 근처 야나카 공동묘지에 가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야나카 공동묘지는 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커다란 공동묘지로 도쿄3대 묘지로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묘지를 좋아해서 이런 저런 나라에서 묘지를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혐오시설이라며 죽음도 주검도 몰아낸 도시에서 자라났기에 더욱 불안에 시달렸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지척에 죽음을 두고, 받아들이고, 향을 피우고, 생각하고, 그 죽음을 삶에서 영위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요? 이곳과 저곳을 나누지 말고 그저 삶에서 죽음을, 죽음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째서 나는 이곳에 묶여 저쪽을 부르짖고 있는지, 어째서 그럼에도 피안화는 보이지 않는지... 별에별 잡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다다른 야나카 공동묘지에서는 고양이들을 만났습니다. 고양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늘어지거나 조금은 여름에 눌린 듯한 걸음으로 그럼에도 종종, 끊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을 감인堪忍하고 있었습니다. 

피안화는 찾을 수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 허기를 달래려 떡집에 들어가 맛 별로 피안의 떡 오하기를 하나씩 총 다섯 개를 샀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피안화 이야기를 꺼냈더니 가게 바로 옆 작은 공원에 해마다 몇 송이의 피안화가 꽃을 티우는데 올해는 더워서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화단 한 켠에는 올곧이 뻗어나오는 줄기들이 있었습니다. 온종일 찾아다녀도 보이지 보이지 않고, 마음 속에서만 불어나는 신기루 같은 저편의 꽃이 이편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작게 내미는 빨간 잎에 처음으로 마음이 설레였습니다. 아직 피지 않은 예감이야 말로 제가 찾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의 아지트 부쟁고로 가서 오하기를 먹으며 줄곧 의문이었던 피안과 차안에 대해 알아보기를 시작했습니다.

거진 10시간이 넘게 걸려 알아보았지만 어떤 언어로도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언어로 위키페디아 등을 뒤져 보니 저쪽 언덕을 뜻하는 피안彼岸이라는 단어는 도피안至彼岸에서 유래한 것으로, 바라밀波羅蜜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명 뿐이었습니다. 

바라밀(婆羅蜜) 또는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어 빠라미따(पारमिता pāramitā)를 음역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티베트 불교에서의 해석 방식에 의하면 '너머pāra'를 목적어로 삼는 대격 'pāram'에, 가다를 의미하는 '√i'가 붙고, 마지막으로 접미사 'tā'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즉 미혹의 '이쪽 언덕此岸'에서부터 깨달음의 '저쪽 언덕彼岸'으로의 이행을 뜻한다 합니다.

다만 피안이라는 말이 범용적으로 쓰여지는 것은 알겠는데 그럼 정확히 어느 문맥에서 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를 피안으로 번역하게 되었는지, 이러한 번역의 시작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피안의 대립어로서의 차안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주어진 정보들 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찾아보니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은 600권에 달하는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산스크리트어: प्रज्ञापारमिता सूत्र prajñāpāramitā sūtra)의 음역으로, 이 중 앞 부분은 최초의 현장법사인 구마라집이 한역하여 한국에서는 흔히 『금강경』으로 불리우고, 뒷부분 내용은 현장법사가 260자로 간추려 『반야심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반야심경에는 '바라밀다'라는 역어는 보여도 '피안'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야경 전체 번역에 해당하는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구마라집 역, 404년)과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현장 역, 663년) 을 뒤져보았는데, 비슷한 대목으로 보이는 곳을 둘 다 '피안'으로 옮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菩薩摩訶薩欲到有爲、無爲法彼岸,當學般若波羅蜜。菩薩摩訶薩欲知過去未來現在諸法如、法相、無生際者,當學般若波羅蜜。
"보살마하살이 유위ㆍ무위의 법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김형준 중역)
『마하반야바라밀경』 1권(ABC, K0003 v5, p.229c02-c05)

若菩薩摩訶薩欲於一切法度至彼岸者,當學般若波羅蜜多。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에서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하면 의당 반야바라밀다를 배워야 하옵니다.(송성수 중역)
『대반야바라밀다경』 10권(ABC, K0001 v1, p.82c22-c23)

결국 한역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저 언덕에 이르는 행위(至彼岸)는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을 배움이기에 이 둘이 결과적으로 동의어임은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의문은 더해만 갔는데, 오래된 경전이니 만큼 반야경의 원문의 진위에 불분명한 점이 있기도 하고, 예의 문장에서는 피안과의 대립으로 차안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부처가 설법한 언어가 산스크리트어 혹은 팔리어, 아니면 그 둘 사이 어느 언어 쯤인 것 같은데, 산스크리트어로는 '너머로 간다pāramitā'는 서술어가 '피안'이라는 명사로 자리잡으며 종래에 없던 개념이 만들어 질 수 있었는지, 그 시작은 누구였는지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한역에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함께 쓰인 문장을 찾고자 하였고, 그 결과 축불념(竺佛念)과 불타야사(佛陀耶舍)가 413년에 공역한 『불설장아함경』 에 이르렀습니다 : 

於我賢聖法中,爲著、爲縛,爲是鉤鎖。彼三明婆羅門爲五欲所染,愛著堅固,不見過失,不知出要,彼爲五欲之所繫縛。正使奉事日月水火,唱言:‘扶接我去生梵天者。’無有是處。譬如阿夷羅河,其水平岸,烏鳥得飮,有人在此岸身被重繫,空喚彼岸言:‘來渡我去。’
우리 현성의 법 가운데에서는 그것을 집착이라 하고 결박이라 하며 갈고리와 쇠사슬이라고 한다. 저 3명 바라문들은 다섯 가지 욕망에 물들고 애착이 굳어져서 그 허물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그는 다섯 가지 욕망에 묶여 있다. 그들은 해와 달과 물과 불을 섬기며 ‘저를 인도하여 범천에 태어나게 하십시오’라고 외치지만 그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아이라하(阿夷羅河)의 물이 기슭까지 가득 차 까마귀나 새들도 그 물을 먹을 수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이쪽 기슭에 몸이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 부질없이 저쪽 기슭을 향해 와서 ‘나를 그쪽 기슭으로 건네주시오’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불설장아함경』 16권(ABC, K0647 v17, p.961b13-b20)

『불설장아함경』 에서는 위와 같이 차안과 피안이 개념적으로 명백히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404년에 구마라집이 번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보다 늦게 번역되었지만, 불타야사가 구마라집의 스승이었다는 점과, 구마라집의 초청으로 축불념과 함께 장안에 와서 『불설장아함경』 을 번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피안'과 '차안'이라는 번역어와 그 개념의 성립은 이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차안에 앞서 피안은 최초의 불경 번역자 중 하나로 알려진 안세고(安世高)가 148년에서 170년 사이에 한역한 『불설아난문사불길흉경』에도 이미 나와 있기에, 이러한 개념의 정립은 어쩌면 불법이 중국에 퍼졌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안과 피안의 대립은  『불설장아함경』 의 원문에 해당하는 문장을 참조할 경우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

Then along comes a person who wants to cross over to the far shore.
But while still on the near shore, their arms are tied tightly behind their back with a strong chain.(Bhikkhu Sujato 역, 2018년)
Atha puriso āgaccheyya pāratthiko pāragavesī pāragāmī pāraṁ taritukāmo.
So orime tīre daḷhāya anduyā pacchābāhaṁ gāḷhabandhanaṁ baddho.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따라서 불타야사와 축불념은 원문의 orima(nearest, nearer; on this side)와 pārima(yonder; farther)를 대립관계로 파악하고서, 이 둘을 차안과 피안으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한문에서 불교용어는 원어라 볼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에는 없는 지시사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고, 그를 통해 보다 명료한 개념적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다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지시사에 대한 이해는 생각만큼 쉽지가 않기에, 고전을 다룰 때에는 보다 섬세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실제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는 지시사가 별도로 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3인칭대명사 tad를 변형하여 사용하기에 문맥에 따라 프랑스어의 지시사 'ce'와 마찬가지로 '이', '그', '저'로 모두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차안과 피안이라는 용어는 불경의 세계를 한문으로 담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개념 명사라 할 수 있을 테고, 실제 다른 문장이나 단어들을 이 두 단어로 통일해서 번역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If you practice in accordance 
with each of these questions
as taught by the Buddha,
you’ll go from the near shore to the far.(Bhikkhu Sujato역, 2018년)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는
눈 뜬 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 이를 것이다.(법정 역, 1991년)

위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말씀에 가장 가까운 자료로 손꼽히는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서도 제일 먼저 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피안도품」의 일부입니다. 아함경 위주로 받아들였던 한국 불교에서는 무소유로도 유명하였던 법정 스님의 번역으로 1991년에 처음 그 면모가 알려졌다고 합니다. 법정 스님의 번역은 일본어의 중역인데, 일본은 1927년부터 1984년까지 다섯 개의 번역 판본이 있었고, 그 중 어떤 번역을 참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앞서 orima와 pārima의 경우와는 조금 달리, 위에서는 너머를 뜻하는 pāra와 에 부정접미사a를 더한 apārā를 각각 피안과 차안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에서 이此와 저彼는 화자의 인식 안에서의 상대적 거리를 가리키는 지시사가 아닌, 인식의 안과 그 너머를 가리키는 절대 지시사로 기능하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 되는 '어차피於此彼'라는 단어에서의 '이렇든 저렇든'은 동일한 위계 속에서의 이곳과 저곳을 가리키지만, 불교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은 그러한 대립을 넘어섭니다. 즉 차안이라 일컬어지는 이승이요, 사바세계娑婆世界요, 감인토堪忍土에서부터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거센 흐름인 폭류暴流를 건너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피안일 테지요.

하지만 한문은 물론이고 한국어에서도 이此와 저彼는 혼용되어 사용될 뿐만아니라, 다른 언어와 문화들이 뒤섞이면서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에서 지시사들의 혼잡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예로는 제가 오래 작업중인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불교적 영향으로 작가가 『만다라』라는 제목도 염두하였던 『팔방치기』의 주인공은 아르헨티나 출신 올리베이라 오라시오로,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집니다. 제1부이자 보내드리는 문학통신의 제목이기도한 '저편으로부터'는 이방인인 주인공이 배회하는 파리가 배경이며, 제2부 '이편으로부터'는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제3부 '다른 편들로부터'에는 공상과 관념이 난무합니다.

이 소제목들의 영·독·불역을 보면 재밌습니다. 영어에서는 this와 that혹은 here와 there의 대립을 버리고 부러 the other side와 this side로 1부와 2부를 옮겼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차안과 피안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this shore'과 'the other shore'를 겨냥한 해석이며, 독일어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언덕UFER'이라는 단어까지 집어넣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기대고 있는 지시사 이/그/저의 불안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문맥에 따라 같은 단어여도 다르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심지어 불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법정 역, 1991년)

솟아난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마치 퍼진 뱀독을 약으로 다스림 같아라.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김출곤 역, 2016년)

뱀의 독이 퍼지는 것을 다스리듯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제압하는 사람은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석지현 역, 2016년)

〔全身に〕広がった蛇の毒を薬で制するように、こみ上げてくる怒りを制する比丘は、この世(俗世)を捨て去る。あたかも、蛇が、それまでの古くなった皮を捨て去るように。
온몸에 퍼진 뱀의 독을 약으로 다스리듯, 솟구치는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이 세상(속세)를 벗어버린다. 마치, 뱀이, 그간의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고시마 키요타카五島清隆  역, 2013년)

orapāraṃ이라는 단어는 앞서 불타야사와 축불념 차안과 피안으로 번역한 orima와 pārima가 합성된 것지만 역자들은 모두 차안과 피안을 피해 다른 단어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법정과 석지현의 경우 뜻은 한자와 같아 보일지언정 부러 '이 세상도 저세상도'와 '이 언덕과 저 언덕'라며 풀어 옮겼으며, 김출곤과 고시마 키요타카는 의식적으로 차안과 피안을 떠올릴 단어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해 김출곤과 고시마 키요타카는 각각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

김출곤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긴 “orapāraṃ”은 숫타니파타의 이 경에만 보인다. “oraṃ(아래, 아래로)”과 “pāraṃ(너머, 너머로)”이라는 두 부사가 결합된 낱말이다. 흔히 “이 세상 저 세상”으로 옮기고 있으나 이는 뚜렷한 경증이 없는 해석이다. “전후상前後想”처럼 심계발과 관련한 표현일 수도 있기에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겼다.

고시마 키요타카
orapāraについては、「劣った・卑近な(ora,Skt.avara)岸(pāra)」と解する他に、「此岸(ora)と彼岸(pāra)」と解して「この世とかの世」の意とする説がある。「此岸」に対する「彼岸(pāra)」はふつう「涅槃、悟りの境地」を指すが、「捨て去る」対象には合わないので、この場合、「この世とかの世」を「人間界と天人界」あるいは「欲界と色界」などと解釈するほかない。つまり、「様々な生存形態をとって流転し続ける輪廻的状態」を指すとするのである。しかし、いずれの解釈でもorapāraが「涅槃・悟りの境地」に対比される「この世・俗世・輪廻の世界」を指していることに違いはない。
(orapāra에 대해서는 '열등하고 비천한(ora, Skt.avara)의 기슭(pāra)'으로 해석하는 것 외에 '차안(ora)과 피안(pāra)'으로 해석하여 '이승과 저승'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 “피안에 해당하는 pāra 보통 '열반,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키는데, 이는 '버리는' 대상에 부합하지 않기에 그럴 경우에는 '이승과 저승'을 '인간계와 천인계' 혹은 '욕계와 색계' 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즉, '다양한 생존형태를 취하며 계속 윤회하는 윤회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든 orapāra가 '열반, 깨달음의 경지'와 대비되는 '세속, 속세, 윤회의 세계'를 가리킨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즉 같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불경이라 할지라도, 경전에 따라 문맥에 따라 지시 대상들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 텐데, 이는 절대적으로 해석의 주체인 번역자가 불법을 어느 정도로 깊이 이해하느냐에 달린 일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법도 산스크리트어도 팔리어도 전혀 모르는 저에게 「뱀의 경」은 유독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찾으려던 피안도 피안의 꽃도 사실은 이쪽에 묶여 너머를 보지 못하는 사람의 집착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이쪽도 저쪽도 어차어피於此於彼 모두 버리고, 나아가 너머에 대한 생각마저 버려야 조금이라도 감지될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피안도 차안도 모두 잊어야 할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간의 심신 고통스러운 생각을 감인하고 나자 추분이 지나갔고,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오늘 다시 공원에 가 보니 피어나지 않을 것 같던 피안화도 결국엔 꽃을 피어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이 왜인지 아쉬워 돌아돌아 처음 들어선 길에서 마냥 아름다운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동네 할머니를 한 분 알게 되었는데, 할머니의 집은 여러 꽃과 식물들로 가득했고, 한 쪽 문에는 칠판을 달아 매 달 새로 꽃 그림을 그리신다고 하십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피안의 꽃이 그 어떤 실물보다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것이 형언하기 힘든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피안화는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또는 '대홍연화大紅蓮華'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mahā-mañjūṣak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입니다. 마하만주사화는 천상에 핀다는 붉은 빛의 커다란 연꽃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하는데, 할머니의 한 점 그림이 제게는 바로 이 꽃이었나 봅니다.

비로소 가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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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통신은 어쩌다 보니 6회에 연달아 곧장 보냅니다.

 

7회는 기존에 번역한 『두이노 비가』의 재출간을 위해, 편집부를 설득하고자 쓴 글입니다. 제 작업을 보아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는 제 번역이나 입장을 드러내는 글을 평소 쓰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독자라면 오직 자신의 눈으로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제 번역을 표절해도 어설픈 비평을 해도 개의치 않으며, 제 번역을 주장하는 글이라면 지금껏 일본에서 쓴 『테스트 씨』의 석사논문이 다입니다. 이번 글도 단지 출판사를 설득하기 위한 용도로 대충 쓴 잡문입니다. 다만 저를 응원해주시는 몇 안되는 분들도 어째서 제가 모든 작업 중에 『두이노 비가』를 중히 여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기에, 기왕 쓴 글을 통해 그런 의문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길 바랍니다.

 

다른 판본이 아닌 손재준 역과 비교한 것은 출판사 요청에 의한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두이노 비가』 번역 당시 스페인어, 프랑스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된 수십 편의 번역본들을 참고한 바, 개중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번역본이라면, -피에르 르페브르와 필립 자코테의 프랑스어본을 꼽겠습니다.

 

현재 제가 작업한 『두이노 비가』는 종이책이 절판되었으나, 헌책으로 시중에서 구할 수 있고, 또 전자책으로 구입 가능합니다. 언젠가 다시 종이책으로 선보일 수 있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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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두 번역의 결정적 차이는 번역문이 독립적으로 시적 문체를 이루고 있는가이지만, 이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기에 원문에 대한 해석과 그 선택에 대해서만 말한다.

 

 

「제1비가」 중에서

원문 :

(…) Ist es nicht Zeit, daß wir liebend

uns vom Geliebten befrein und es bebend bestehn:

wie der Pfeil die Sehne besteht, um gesammelt im Absprung

mehr zu sein als er selbst. Denn Bleiben ist nirgends.

 

손재준 역 :

우리가 사랑하면서

연인으로부터 벗어나, 떨면서 참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마치 화살이 힘을 모아 날아가서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 떨면서

시위를 견뎌 내듯이. 참으로 머무름이란 어디에도 없다.

 

최성웅 역 :

(…) 이제는 우리가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어, 떨면서 견뎌낼 시간이 아니겠는가?

마치 시위를 견딘 화살이 집약된 힘으로 날아가 그 자신으로,

그 이상으로 존재하려는 듯이. 이제 그 어디에도 머무름이란 없기에.

 

코멘트 :

『두이노 비가』에서 말하는 사랑은, 마음의 위안이든 육체적 보상이든 간에 보답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특히 연인 간의 사랑이란 외사랑이 아니라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로부터도 사랑받기를 갈구한다. 위 시구에서는 이러한 사랑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선 어떠한 비인간적인 사랑을, 인간을 넘어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사랑을 하기 위한 방식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릴케는 통상적으로 쓰는 표현에 이른바 낯설게 하기효과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원문1,2행을 살펴보면 ‘liebend’‘Geliebten’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는데, 각기 사랑하다라는 동사 ‘lieben’에서 파생된 현재분사와, 과거분사 ‘gelieb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Geliebte는 남성명사로 쓸 경우는 사랑받는 (), 여성명사로는 사랑받는 여자로 통상 사용되기에 손재준은 이를 연인으로 옮겼다.(이러한 번역은 손재준 외 다른 모든 한국어 역자도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제1비가」에서 릴케가 기리는 사랑이란 가스파라 스탐파와 마찬가지로 연인을 잃고서도 여전히 사랑하는자이다. 이는 인간적인 사랑의 범주를 넘어선 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최성웅은 현재분사와 과거분사가 지닌 근본적인 의미, 즉 사랑의 능동과 수동을 드러내고자 각각을 사랑함사랑받음으로 번역했다.

 

또한 손재준은 한국어의 일반적 어순에 맞춰 2행과 3행과 4행의 순서를 뒤섞어 번역했다 :

마치 화살이(wie der Pfeil) 힘을 모아 날아가서(um gesammelt im Absprung-3)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mehr zu sein als er selbst.-4)  떨면서 (es bebend bestehn-2) 시위를 견뎌 내듯이.

 

최성웅은 2,3,4행의 순서를 맞추어 번역했는데, 위 경우에는 그 차이가 본질적이다. 인간을 넘어선 사랑을 한다는 것, 이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초월 혹은 해탈이고, 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을 이름하는데, 릴케는 여기에서 신학과 철학이 아닌, 오직 문학으로만 가능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끊어내고 폭류를 건너기를, 부처가 되기를 가르치고, 철학에서도 이러한 초월 혹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육체에 감관(sens)를 지닌 존재로, 감각(sense)하고 의미(sense)지음으로써 하나의 방향(sense)을 지향하는 인간이 인간인 상태로 저 너머를 가기란 지난하다.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신학과 철학에서도 볼 수 있는 초월의 방식이다. 하지만 『두이노 비가』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몸뚱어리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그 존재를 버리지 않고 초월을 바라보는 방식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떨면서’, ‘견뎌내는 것이고, 그래야 평소 존재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치 시위를 견딘 화살이 집약된 힘으로 날아가’, ‘그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이성이 아니라, 문체로서 감동시키는 방식으로서, 문학으로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순서를 그대로 재현할 필요가 있다.

 

 

「제7비가」 중에서

원문 :

Werbung nicht mehr, nicht Werbung, entwachsene Stimme,

sei deines Schreies Natur; zwar schrieest du rein wie der Vogel,

wenn ihn die Jahreszeit aufhebt, die steigende, beinah vergessend,

daß er ein kümmerndes Tier und nicht nur ein einzelnes Herz sei,

das sie ins Heitere wirft, in die innigen Himmel.

 

손재준 역 :

구애가 아니다, 더는 구애가 아니다,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

그것이 네 외침의 본성이게 하라. 너는 상승하는 계절이 높이 품어 주는 새처럼 순수하게 외치리라,

그때 계절은, 거의 잊고 있는 법이다,

새가 근심에 차 있는 한 마리 짐승이라는 것을, 그리고 청명한 대기 속으로,

그 지순의 하늘 속으로 계절이 던져 올리는 오직 유일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최성웅 역 :

구하지 마라, 구해서는 아니 된다. 터져 나오는 소리가

외침의 바탕이 되게 하라. 새의 비명같이 순수해야,

솟아오르는 계절에 드높아지는 새처럼, 한낱 마음이 아니라,

불안한 짐승임을 거의 잊고서, 명랑함 속으로,

내밀한 하늘 속으로 내던져진다.

 

코멘트 :

우선 손재준의 위 번역은 원작의 행들을 뒤섞어 놓았을 뿐 아니라 비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은 Werbung 번역에 대한 차이다.

Werbung은 동사 werben을 명사화한 것인데, werben은 무언가 대상을 얻고자 애쓰거나’, ‘추구하려는의지나 작위가 개입된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Werbung은 현대에 있어 광고라는 뜻으로 제일 많이 사용되며, 연애에 있어서는 부러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하지만 「제1비가」에서 살펴 보았듯이, 릴케는 이러한 통상적인 사랑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고, 오히려 그러한 작위 때문에 진정한 사랑의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적인 의지보다 시에서는 언제나 ’, ‘사자’, ‘모기등의 비인간적인 사물이 보다 순수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는 단순 연인간의 사랑에 한정되는 일이 아닐진대, 손재준 외 다른 번역가들도 모두 구애라고 번역하여 총 10편의 『두이노 비가』가 그리는 대장정을 좁은 세계에 한정시켰다.

 

 

10비가에서

원문 :

Dass ich dereinst, an dem Ausgang der grimmigen Einsicht,

Jubel und Ruhm aufsinge zustimmenden Engeln.

 

손재준 역 :

나 언젠가 무서운 인식의 끝에 서서

화답하는 천사를 향해 환호와 찬미의 노래 크게 부르게 되기를.

 

최성웅 역 :

바라건대 나 언젠가, 하나로 보려는 가혹한 인식의 출구에 서서

화답하는 천사들에게 영예와 환희의 노래 올릴 수 있어라.

 

코멘트 :

「제1비가」에서부터 「제10비가」에 이르기까지 천사란 인간으로서 도무지 헤아릴 수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따라서 「제1비가」에서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라 부르짖으며, 그런 천사 중 하나가 나를 가슴에 품더라도’, ‘보다 강한천사라는 존재로 인하여나는 사라지고야 만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럼에도 이미 인간적 사랑의 한계를, 인간적으로 존재함에 한계를 깨달은 시인은 천사를 향하고 있으며, 「제10비가」는 그러한 대장정의 결말부에 해당한다. 나의 존재가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소리지르고, 상대를 끔찍하다고 여기던 시적화자는 비로소 인간의 개별자적 한계에 갇히지 않고서, ‘천사를 향해 환호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앞서 설명하였듯이 어디까지나 문학적이고, 그렇기에 『두이노 비가』가 근현대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행의 an dem Ausgang der grimmigen Einsicht 부분을 손재준은 무서운 인식의 끝에 서서라고, 최성웅은 하나로 보려는 가혹한 인식의 출구에 서서로 옮겼다.

 

즉 최성웅은 Einsicht, 영어로는 Insight에 해당하는 단어를 하나로 보려는 인식으로 옮겼는데, 이는 개별자로서의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나라는 자아이며 아집인 것에 심신이 사로잡혀 있고, 끊임없이 그러한 나를 다른 것과 동일시(identify)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를 지키고자 한다. 일본에서 처음 정립된 통찰Einsicht라는 단어는 이러한 개별자적 존재의 일관성을 긍정하는 단어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꿰뚫고, 손아귀로 쥐듯이 파악하려고, ‘인식하려고 든다. 하지만 그렇게 그러모은 나라는 개별자는 보다 강한 존재인 천사 앞에서 흩어지고 사그러들 따름이기에, 「제1비가」에서는 무력히 절규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제1비가」에서부터 「제9비가」까지를 거치며 (실제 비가는 순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 마침내 「제10비가」에서 자기 존재를 파괴할, 나라는 아집을 끊어낼 천사를 보고 찬미할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찬미 역시, 인간을 뛰어넘은 채로도, 인간 안에 머무른 채로도 아닌, 단일성의, 하나로 보려는 인식Einsicht의 경계에, 출구에 서서 행하는 것이기에 오직 문학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제1비가」 중에서

원문 :

Wer, wenn ich schriee, hörte mich denn aus der Engel

Ordnungen ? und gesetzt selbst, es nähme

einer mich plötzlich ans Herz: ich verginge von seinem

stärkeren Dasein. Denn das Schöne ist nichts

als des Schrecklichen Anfang, den wir noch grade ertragen,

und wir bewundern es so, weil es gelassen verschmäht,

uns zu zerstören. Ein jeder Engel ist schrecklich.

 

손재준 역 :

내가 소리쳐 부른들, 천사의 서열에서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들어 주랴? 설혹 어느 천사 하나 있어

나를 불현듯 안아 준다 하여도 나는 그의 보다 강력ㄷ한

존재에 소멸하리라,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아직은 견뎌 내는 두려움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우리가 그처럼 찬탄하는 것도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일 따위는 멸시하는 까닭이다. 모든 천사는 두렵다.

 

최성웅 역 :

누구냐, 나 울부짖은들, 천사의 대열에서 그 누가

내 울음에 귀 기울여준단 말이냐? 심지어 그중 한 천사가

순간 나를 가슴에 품더라도, 보다 강한 존재로 인하여

나 사라질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내는

저 끔찍한 것의 시작일 따름이기에.

놀라운 점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데 있어

냉담하다는 것이다.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

 

코멘트 :

상기하였듯 천사를 대하는 시적화자의 태도는 「제1비가」와 「제10비가」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하기에 제1비가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단어 ‘Wer,/영어 who에 해당하는 의문부사이다의 번역 역시 중요하다. 아직 개별자적 한계에 머무는 시적 화자 앞에, 그 존재를 넘어서는 천사의 등장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는 단순하며 즉각적고 생리적인, 단말마의 비명을 자아낸다. Wer라는 한 음절의 단어는 따라서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를 접하고 지르는 비명이 되어야 한다. 기존 한국어 번역에서 이를 인식하고 문장 첫머리에 비명으로 남기려 한 것은 최성웅 번역 외에 이정순 역(뉘라서,)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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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짧은 체류를 마치고 동경으로 돌아오기 전, 유유출판사 조성웅 대표로부터 『단단한 독서』 9쇄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단단한 독서』는 여러 모로 제게 고마운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번역가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작업한 인문서 중에 유일무이하게 제 생계에 직접적으로 보탬이 되었고 또 되고 있으며, 제 작업의 특성상 한정된 독자만을 상정하는 책들과 달리 여러 단계에서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열려 있고, 책의 저자인 에밀 파게도 처음 편역을 했던 이휘영 선생도 제게는 각별한 의미로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휘영 선생을 잠시 떠올리다 한국에서 예기치 않았던 두 친구와의 만남이 인상 깊었는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조금은 길게 잡문을 끄적이고 싶어졌습니다.

이휘영 선생


이휘영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대 중반에 프랑스어 학습을 시작할 무렵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어를 기반으로 한 좋은 프랑스어 교재나 문법서는 찾아볼 수가 없어 한국어 화자가 프랑스어를 깊이 배우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단 하나 예외로 훌륭한 불한사전이 있고, 그 저자가 바로 이휘영 선생입니다.


통용되는 불한사전으로는 『엣센스 불한사전』과 『프라임 불한사전』이 있는데, 후자가 네이버 사전 소스로 활용되어, 현재는 프랑스어 학습자 대부분이 프라임 사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만 불불사전의 번역에 지나지 않는 프라임 사전과 달리, 이휘영 선생의 『엣센스 불한사전』은 비인도유럽어권 화자가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언어를 감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작업물입니다. 예를 들어 objet라는 단어를 네이버에서 찾아보면 총 10개로 분류해 물체, 대상, 주제, 객체, 오브제 등의 의미만 나올 뿐 어째서 이 많은 의미가 하나의 단어에 담겨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휘영 선생이 집성한 에센스 사전을 볼 경우, 어원인 ob-jecere를 밝히고, 그 뜻이 ‘앞에(ob/devant) 던지다(jecere/jeter)’에서 왔음을 알려줍니다. 즉 내 앞에, 나와 대치하여 던져진 것이기에 대상(對象, Gegenstand)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내 안에 받아들이지 않고 밖으로 던지기 때문에 그 동작은 거부(objection)가 됩니다. 이처럼 한국어만을 두고 봤을 때 멀어만 보이는 단어 사이의 간격을 메꿔주고, 각각의 마디를 더듬을 수 있게 해주는 사전이, 최초의 불한사전인 『불한소사전』(1960)에서 시작하여 『엣센스 불한사전』(1984)이 나오기까지, 오직 한 명의 애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한 권의 사전과 제게 처음 프랑스어의 길을 밝혀주셨던 양창집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황무지와 같은 한국에서 제가 프랑스어를 잘 배우기는 불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문헌학적 토대가 빈곤한 한국에서 둘의 도움이 있었기에 인도유럽어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고, 나아가 라틴어나 독일어 등 다른 언어들을 통해 프랑스어를 겪을 수 있었습니다.

고바야시 히데오가 번역한 『테스트 씨』와 마츠무라의 중세 불어사전


그럼에도 뮌헨에서의 공부를 뒤로 하고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도 이휘영 선생은 제게 그저 혹은 오직 좋은 사전의 저자였습니다. 그리고 근현대시를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서구의 문예를 한국어로 담아내려는 사람으로서, 제 앞을 살아간 ‘선생’은, 보려하면 볼 수록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문학에 있어, 누군가는 언어에 있어 좋은 선생일 수 있었지만, 프랑스 문학을 한국어로 옮긴다는 행위에 있어 마냥 감탄하며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고, 세간에서 선생이랍씨고 문학이라며 포장된 사람들의 문체는 기만과 협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시를 번역한 파울 첼란, 그러한 첼란을 번역한 장-피에르 르페브르와 필립 자코테의 언어를 선생으로 삼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뒤늦게 일본에서 모리 오가이의 독일어 노트, 이쿠타 코사쿠의 불문학 번역, 고바야시 히데오가 선보인 『테스트 씨』 초역,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마츠무라 타케시의 『중세프랑스어사전dictionnaire du français médieval』 등을 보며 느낀 전율을 한국어로 느낄 순 없었고, 조금은 외로웠고 또 심심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김택규 중국어 번역가로부터 이름이 똑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유유출판사의 조성웅 대표를 소개받았습니다. 위화를 번역하기도 하였던 조성웅 대표가 만든 유유출판사는 지금에 와서는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1인출판사로 저역자 풀이 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1인출판사로서 성장하기 위해, 분량이 많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교양서를 내고자 했던 조성웅 대표가 제안한 책은 다름 아닌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l’art de lire』였습니다. 에밀 파게는 19세기 프랑스 작가로 한림원Académie Française 회원이었으며, 철학자이자 교육자 혹은 비평가로 당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저자가 오랜 공부 끝에 노년에, 어떠한 작위도 없이, 실증적으로 책을 읽는 법에 대해서 쓴 이 작품은, 도끼니 인생이니 하며 쓰잘 데 없는 인상평을 늘어놓는 기타의 책읽기 관련 책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정말로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단어를 살펴야 하는지, 문장부호를 어디까지 의식해야 하는지, 무엇을 읽지 말아야 하는지 등을 실제 텍스트를 예로 들며 면밀히 가르쳐 주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돌고 돌아, 공교롭게도, 완역이 아닐지언정 이 책을 먼저 1959년에 한국어로 옮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휘영 선생이었습니다. 프랑스어 학습의 시작을 함께해준 이휘영 선생의 흔적을 다시 발견해 기뻤습니다. 평소라면 번역하는 책의 다른 판본을 작업 중에 참고하지만, 뿌리도 없이 자라나는 제 언어가 선생의 언어와 어떻게 닮고 다른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번역이 끝날 때까지 선생의 번역을 부러 보지 않았고, 번역이 끝나고 나의 언어와 선생의 언어를 견주며, 비로소 제 앞에,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단 하나의 불문학번역가가, 선생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메이지 대학과 아테네 프랑세


한국어라 할지언정 선생의 언어와 저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시대적으로 우선 그에게 있어 한국어는 모국어가 아니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기 전, 일제 치하인 1919년에 태어났기에 그의 ‘모국’어는 일본어였으며, ‘모’어는 조선어였습니다. 두 언어의 긴장 속에서 자라났을 테고,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하던 그에게 학문의 언어는 일본어였을 테고, 그러한 일본어를 바탕으로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주로 일본어를 통해서 문학이라는 세계를 경험했을 터고, 1945년 광복절을 맞이한 다음 모국어가 한국어로 탈바꿈했기 때문입니다.

경성제국대학


평양 출신이었던 그가 어떠한 계기로 도쿄로 떠났으며, 언제부터 불문학을 공부할 결심을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불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일본으로 떠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제국대학의 하나로 여섯 번째로 세워진 경성제국대학에서 (일본어인) 국어국문학, 영어영문학, 조선어조선문학, 지나어지나문학을 전공할 수는 있었지만 불어불문학 전공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생은 도쿄의 메이지대학에서, 또 당시 일본에서 라틴어와 희랍어는 물론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중심 공간이었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였고, 해방 후 다음 해에 서울대학교로 탈바꿈한 곳에 불어불문학과를 창설하여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어로 불문학과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휘영 선생 이전에 조선인으로서 불문학을 접한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김억은 베를렌 등의 시를 옮기며 조선어 최초로 근현대시집 『오뇌의 무도』(1921)을  선보였고, 이휘영 선생에 앞서 손우성 등이 도쿄의 호세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며 해외문학파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들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조선어를 모어로 한 문예Literatur였을 뿐이고, 한국어를 기반으로 프랑스 문학Literaturwissenshcaft은 이휘영 선생이 학문Wissenschaft으로서 불어불문학과를 창립한 이후부터 가능했으니, 그를 두고 한국 불문학의 시작이라 말하여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1953년에 발간된 이휘영 번역과 1951년에 번역된 일본어역


또한 카뮈의 『이방인』 번역을 통해 비로소 한국에서 문학의 동시성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본래 Literature의 번역어로 정립된 문학이란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 또한 대체로 일본어를 통해 개화기부터 받아들였기에 남의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여전히 실존주의 이전의 서구문학은 한국(어)문학과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일본의 경우, 서구문학을 수입하고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번역을 통해 일본(어)문학이 성장하여 초현실주의 때부터 세계와 동일선상에서 문학을 한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퍼진 것을 보면 이러한 느낌도 꼭 틀리진 않을 테지요. 여하간 이휘영 선생의 한국어로의 『이방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의 설명 마냥 1951년에 ‘동양에서 최초의 번역되었다’라는 말의 진위와 상관 없이, —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 블로그 글을 참고해도 좋겠습니다 : https://tmitmi0228.tistory.com/121 —, ‘큰 의의’를 갖습니다. 이방인異邦人이라는 명사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호리 타츠노스케가 소매袖에 넣고 다닐 보물珍로 편찬한 『영일대역사전英和対訳袖珍辞書』 개정판(1867)에서 stranger의 역어로 소개되었고, 또 같은 이름으로 일본에서도 쿠보다 케사쿠가 1951년에 『이방인』 완역을 선보였습니다. 아마도 이휘영 선생의 번역도 이런 일본어와 일본문화로부터 무관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시작점이 달랐던 일본과 동시대에 카뮈를 소개했고, 불한사전도 없던 시기에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이러한 작업을 해내어 동시대 많은 독자에게 영향을 주고, 이후 평론가 김현이나 김화영 번역가 등을 통해 실존주의가 한국에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점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이휘영 선생을 한국 불문학의 끝이라 칭한 것은 자조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조선어와 일본어, 프랑스어, 한국어로 궤적을 그리며 선생이 문학을 통해 바라보던 근대와 한국은 어땠을까, 불모지로 막막했을지언정 어떠한 사명감이나 희망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되레 오늘날, 시간이 흐르고, 몇 세대에 걸쳐 불문학이라는 이름 하에 무언가 글들이 쌓였다 한들, 더는 매체의 중심이 문자나 문학인 시대가 끝나고, 선생께서 만드신 불문과에도 태반이 다른 이유로 대학과 학과에 진학하고, 대학원에 들어갈 때부터 교수자리 등을 염두하여 제한된 공부를 하고, 연구자도 번역가도 작가도 편집자도 독자도 저 스스로를 기만하며 탈바꿈된 문학의 껍데기를 좇는 불명불암의 어둠 속보다는 낫지 않았을까하는 상상 말이지요. 물론 이러한 뿌리 없음 혹은 뿌리 사라짐이 새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카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No soy coreano, ni soy japonés, yo soy desrraigado’ 라며 부르짓고, 김석범이 모어와 모국어를 구별하듯 Japanese-korean들을 관통하는 정서였을 테지요.

『군계』 4권 중에서


그러나 왜인지 저의 언어는 여전히 뿌리가 없는 것만 같고, 출판Publishing을 통해 독자Public을 만나려던 마음은 사그러든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다행인지, 이번 한국 체류에서는 이러한 삭막함을 누그려트려줄 친구 둘을 뜻하지 않게 만나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오직 자위로만 작업을 할 뿐인 저와 달리, 자라나는 미래를 위해, 혹은 어딘가 남아 있을 참된 독자를 위해, 작가로서 혹은 편집자로서,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책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게 ‘이편’은 없고 ‘저편’만 있다는 생각은 그냥 궁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휘영 선생에 대해 조금 조사를 해보다 휘영하다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텅 비어 허전하다’라는 뜻이라는데, 정말이지 휘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휘영함이야 말로 문학이며, 『군계』에서 한 공수空手도가의 말마따나, 공空하고 허虛하고 무無해서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Posted by vasi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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