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7

떠들기 2020. 7. 17. 04:14

의욕없는 나날이 계속된다. 수업 등의 이유가 없으면 며칠이고 종일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의욕이 들 경우 조금 작업한다. 지척에서 쉬이 보고 헤어질 수 있는 동네 친구 둘을 제외하곤 만남 자체가 버거워서 아무리 마음 가는 사람이어도 약속을 잡을 엄두도 나지 않는다. 지드의 팔뤼드를 읽다가 한국어로 번역이 혹여 된 적이 있나 찾아보니 번역가 윤석헌이 작업을 하는 것 같다. 예전에 잠시 봤던 사람 같은데, 좋은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오뚜기에서 나온 부대찌개면을 처음으로 먹어 본다. 언제 일본에 갈 수 있을까.

Posted by vasistas
,
도용 및 무단 배포를 금지. 편집 전 원고의 일시적 공개로 이후 정식 출간된 작품을 사서 읽기를 권장.

 

Rayuela : 팔방치기

-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vasistas 옮김

###

 

12

 

      

 

     그레고로비우스가 구사회에 실망할 일은 단 한 번도 없는데, 기실 구사회는 엄중한 의미의 클럽이 아니며, 따라서 그의 지고한 장르 개념에 부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로널드가 좋았는데, 그건 로널드의 아나키스트적 성향이나 밥스 때문이기도, 그 둘이 무엇 하나 대수로워 하지 않으며 조금씩 조금씩 저 자신을 죽여가는 형국이기에, 카슨 맥컬러스[각주:1]·밀러[각주:2]·레몽 크노[각주:3]를 읽는다든지 겸허한 해방활동이라도 되는 양 재즈에 몰두하며 자신들이 예술에서 실패했음을 깨끗이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따져보면 오라시오 올리베이라도 싫지 않았는데 오라시오와는 일종의 물고 뜯는 관계로, 오라시오가 없을 때에는 아무런 내색도 않고서 그를 찾아다니다가 정작 마주치게 되면 그 즉시 그 존재만으로도 열불이 났고, 반면 오라시오로서는 그레고로비우스가 제 태생과 삶을 숨기고자 내세우는 쌈마이 신비주의가 우습기도 하거니와, 그런 그가 마가한테 흠뻑 빠진 사실을 모를 줄 아는 듯 구는 게 웃길 따름이었으니, 이렇게 둘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서로를 내치는 일종의 초근접 투우 경기를 벌이는 바, 결국 이는 구사회 모임의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여러 활동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들은 똑똑한 척을 한다든지 알 듯 말 듯한 일련의 암시로 마가를 절망케 하거나 밥스를 화나게 만들기를 일삼았는데, 그런 장난질은 그저 지나가며 내뱉는 아무런 말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이를테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로비우스가 오라시오와 자기 사이에 일종의 환멸 어린 쫓고 쫓김으로 한 쪽이 하나가 천국의 개[각주:4]를 읊으며 I fled Him 하고 운을 떼면, 마가는 그런 두 남자를 바라보며 볼품없는 절망 따위를 느끼고, 그럼 또 다른 한 쪽은 얼씨구나 en volé tan alto, tan alto que a la caza le di alcance[각주:5] 읊조리다 결국엔 지들끼리 좋다고 웃어대는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오라시오는 아뿔싸 뭔 놈의 연상기억법이랍씨고 이렇게 나댔나 하며 메스꺼움을 느끼고, 그레고로비우스는 자기가 은연중에 일조했다는 느낌이 들어 둘은 서로 한 패가 된 듯한 앙심 따위를 품게 되는데, 그랬다가도 또 이 분만 지나면 다시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니 그야 말로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구사회 모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행태라 하겠다.

 

     “이곳에서 이렇게 맛없는 보드카를 마시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죠.” 그레고로비우스가 잔을 채우며 말했다. “루시아, 제게 어린 시절 어땠는지 말하려 했죠. 쉽게 상상이 가는 게 제 고향 트란스실바니아에서 여자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머리를 땋은 소녀가 강가에 서 있어 그녀의 빨간 볼이 저주받은 루테시안 기후로 인해 결국엔 하얗게 질리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려나요.”

     “루테시아노요?” 마가가 물었다.

     그레고로비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뭔 말인지 설명을 시작하면 마가는 또 고분고분 경청을 하는데, 이러한 대치 상황은 언제나 그렇듯이 한껏 집중을 하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긴장이 풀려 해방되는 식으로 끝이 났다. 이윽고 로널드는 호킨스[각주:6]의 오래된 음반을 틀고 마가는 조금 뿔이 나버렸는데, 음악 감상을 망치기도 망쳤거니와 자신이 언제나 바라마지 않는 설명이란 소름을 끼치게 만든다든지 깊이 숨을 들이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러니까 호킨스가 다시 멜로디를 공격하기에 앞서 들이마시는 숨같은, 또 가끔은 오라시오가 친히 난해한 시구를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려할 때, 그로부터 더해지는 경이로운 어둠으로 인해 들이마시게 되는 숨으로, 만약에 지금 그놈의 루테시아노가 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이 그레고로비우스 대신 오라시오였다면, 호킨스의 음악도 루테시아노도 초록 양초의 불빛도 전율도 반박불가능한 단 하나의 확신이었던 깊은 숨마저도 모두 하나로 녹아들어, 비견될 것이라고는 오직 로카마두르라든지 오라시오의 입술, 혹은 가끔 너무 마모되어 거의 듣기 힘든 지경의 모차르트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아다지오만이 줄 수 있을 행복이 되었으리라.

     “그러지 마시고요,” 그레고로비우스가 눈치를 보아가며 말했다. “저는 그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당신에게 어떠한 면모들이 있는지를 조금 더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 삶 말인가요,” 마가가 말했다. “아무리 술에 취한다 해도 말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제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해서 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지도 않고요. 더군다나 저한텐 유년이랄 게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르체고비나[각주:7]에서였지만 말입니다.”

     “전 몬테비데오였어요. 한 가지 말씀드릴 게, 가끔은 초등학교가 꿈에서 나오는데, 그랬다가는 너무도 끔직스러워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요. 그리고 열다섯 살이란, 그런데 그쪽도 언젠가 열다섯 살이었던 적이 있는진 모르겠네요.”

     “아마도요.” 그레고로비우스가 확신은 할 수 없는 양 말했다.

     “전 있어요, 마당에 화분들이 있던 집이었는데, 아빠가 마테를 마시며 역겨운 잡지를 읽었죠. 가끔 아빠가 찾아들곤 하나요? 그러니까 유령 말이에요.”

     “아니요, 실제로 그런 건 엄마 쪽이었죠.” 그레고로비우스가 말했다. “무엇보다도 글래스고의. 글래스고에서 엄마가 가끔 찾아드는데, 그렇다고 해서 유령은 아니에요. 너무 축축이 젖은 기억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다예요. 알카 셀처[각주:8]를 먹으면 사라지니, 별 문제는 아니지요. 그런데 그쪽은...?”

     “알게 뭐예요.” 마가가 조급한 듯이 말했다. “바로 음악이, 초록 양초가, 저기 구석에 인디언처럼 오라시오가 있는 걸요. 아빠가 어떻게 찾아드는지 제가 왜 말해 줘야 하지요? 쨌든 며칠 전 집에서 오라시오를 기다릴 때, 밖은 이미 어두웠고 전 침대 옆에 앉아 있었는데, 밖에선 지금 이 음반처럼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그래요, 조금 그랬는데, 저는 오라시오를 기다리며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불이 어떻게 깔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드러누운 아빠가 보였고 술 취해 잘 때면 언제나 그러듯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요. 두 다리랑 가슴에 손을 얹힌 모습도 보였어요. 소름이 돋아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아마 언젠가 겪어 보셨을... 그런 두려움이었어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문이 너무 멀었고, 복도 끝으로는 또 복도가, 문은 자꾸만 멀어져갔고 핑크색 이불은 오르락내리락,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러고 나면 곧장 손이 하나 나타났다가 그 다음엔 두 눈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고리 같은 코가 드러나는데, 아니, 굳이 이 모든 걸 다 말씀 드릴 필요가 없지만, 어쨌든 결국 제가 너무 소리를 질러댔는지 아래층 여자가 와서 차를 한 잔 주었고, 그런 다음에 오라시오는 저를 히스테릭 환자 취급을 했죠.”

     그레고로비우스는 마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마가는 머리를 수그렸다. “이제 됐어”, 오라시오는 안전망도 없이 펼쳐지는 디지 길레스피[각주:9]의 공중그네 곡예를 따르는 것을 멈추고서 생각했다. “이제 됐어, 이렇게 될 모양이었어. 여자에 미쳐가지고는, 열 손가락으로 그걸 입증하는 식이란. 이렇게 똑같은 장난질이지. 이처럼 우린 닳고 닳은 신발에 발을 집어넣고, 머저리처럼 우리에게 배정된 진부한 역할을 답습하고 있어.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게 다름 아닌 나라면, 그러면 마가는 곧장 라플라타[각주:10] 가족사를 이야기해 줄 테고, 그러면 우리는 측은한 마음에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고 싶어질 텐데, 다들 조금 취한 상태라, 일단 천천히 눕히고 어루만지다, 또 천천히 단추 하나하나 지퍼 하나하나 풀어가며 옷을 벗기려 들면, 그녀는 가타부타하다가 몸을 일으킨 다음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고, 그러고는 무언가 숭고함이라도 제안하듯 우리를 껴안고, 슬립을 내리는 것을 돕고서 발끝으로 구두를 벗으니, 그런 모습이 우리에겐 반항으로 보여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해버리고 말지, 아 정말이지 참으로 천박하다, 천박해. 오십 그레고로비우스 이 불쌍한 자식아, 네 놈 면상을 날려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바람도 연민도 없이, 디지가 지금 불어재끼는 것처럼, 연민도 바람도 없이, 디지의 연주만큼이나 완벽히 무엇 하나 바라지 않고서.”

     “역겨워 죽겠네,” 올리베이라가 말했다. “누가 날 좀이 쓰레기 같은 만찬에서 빼 달라고. 난 이제 더 이상 클럽에 오지 않겠어, 이렇게 똑똑한 원숭의 지껄임을 들어야 한다면 말이야.”

     “신사분께서는 밥bop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로널드가 비꼬며 말했다. “좀 만 기다리라고, 이거만 끝나면 폴 화이트먼[각주:11]을 틀어줄 테니.”

     “협상 타결,” 에티엔이 말했다. “자 그럼 전원 합의했으니 베시 스미스를 들읍시다, 로널드, 자기야, 새장 속 비둘기를 좀 틀어줘.”

     로널드는 밥스와 함께 왜인지 모를 웃음을 터뜨리고서 오래된 음반 더미를 뒤적였다. 바늘이 끔찍하게 튀었고, 무언가가 깊은 곳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 마치 음악과 청중 사이에 겹겹이 솜이 쌓인 느낌으로, 노래하는 베시의 얼굴은 붕대에 감겨 빨래바구니를 뒤집어 써서, 점점 더 숨 막히고 넝마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목소리가 분노도 비굴함도 없이 I wanna be somebody’s baby doll, 애원을 했다가 기다림에 접어드니, 그러면 모퉁이와 노파들 가득한 집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튀어 나와 to be somebody’s baby doll, 더욱 뜨겁고 더욱 갈망 어린 목소리로, 바야흐로 헐떡임이 되어 I wanna be somebody’s baby doll...

     크게 들이킨 보드카에 입을 불태우며, 올리베이라는 밥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부드러운 그녀의 몸에 몸을 기댔다. “중재자[각주:12]들이란”, 천천히 담배 연기에 잠겨 들어가며 그는 생각했다. 베시의 목소리는 음반의 끝을 향해 가늘어져, 이제 곧 로널드가 베이클라이트[각주:13] 판을(정말 베이클라이트 판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집으리니, 그럼 이 마모된 물질로부터 다시 한 번 더 Empty Bed Blues가, 20년대 미국 어느 골목에서의 밤이 태어나리라. 로널드는 두 눈을 감고서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으로 거의 티가 나지도 않게 리듬을 탔다. 마찬가지로 웡과 에티엔도 눈을 감고 있었고, 방은 거진 암흑에 물들어 오래된 음반으로부터 삐걱거리는 바늘 소리 들려왔고, 올리베이라로서는 이 모든 일이 벌어진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어째서 이곳이며 어째서 구사회며 이런 멍청한 의식들인가, 어째서 베시가 부르는 블루스가 이런 식이어야 한단 말인가? “중재자들이란”, 그는 밥스와 달라붙은 채 몸을 흔들며 좀 전과 같은 생각을 다시 한 번 떠올렸고, 이때 밥스는 완전히 술에 취해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베시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 정박과 당김음에 맞춰 몸을 떨면서, 블루스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지 않기 위해, 빈 침대며 다가올 아침이며 물구덩이에 잠긴 신발이며 연체된 집세며 노쇠에 대한 두려움이며 침대 다리맡 거울 속으로 비추는 여명의 잿빛 영상들에 머물고자, 이 모든 블루스에, 삶의 무한한 바퀴벌레cafard[각주:14]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마냥 속으로 흐느꼈다. “중재자란 하나의 비현실성이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는 모습의 성인들처럼, 우리에게 다른 무언가를 가르킨다. 그것이 존재한다든지 우리가 실로 여기 있음이, 내가 누군가 오라시오라 불리는 자일 리는 없다. 저기 저 환영, 20년 전 차 사고로 죽은 한 흑인 여자의 목소리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사슬 속 고리들로, 아니면 우리 어떻게 여기에 버티고 서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오늘 밤 모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망상들로 이루어진, 합의나 공모의 규칙들로 이루어진 장난作亂이 아니라면, 가늠을 넘어선 딜러의 두 손에서 놀아나는 한 벌의 트럼프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울지 마” 올리베이라가 밥스에 귀에 대고 말했다. “울지말라고 밥스, 모두 다 결코 사실이 아니니.”

     “아니야, 아아, 아니야 사실인걸” 팽하고 코를 풀며 밥스가 말했다. “아아, 사실이 맞다고.”

     “그렇게 되겠지.” 올리베이라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지만 현재 사실은 아니지.”

     “여기 이 그림자들처럼 말이지.” 이쪽에서 저쪽으로 손을 움직이는 밥스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오라시오, 너무도 슬픈데 왜냐하면 모두 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거야.”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베시의 노래며 구구구구 콜먼 호킨스의 달콤한 울음이 망상이 아니라면, 또 뭔가 더 악질의 다른 망상들을 발판 삼은 망상이 아니라면, 뒤를 향해 나아가는, 천지창조의 첫 번째 날 물 속에서 저 자신을 바라보는 원숭이를 향한 아찔한 사슬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밥스는 울음을 그치지도 않은 채 앞서 “아아, 아니라고, 사실이라니까.”라고 말하였으며, 올리베이라는 자신도 조금은 취해버린 나머지, 결국 진실이란 베시와 호킨스가 그저 망상이었다는, 왜인즉 오직 망상만이 제 신도들을 이끌 수 있고, 진실이 아닌 망상만이 가능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중재intercesión[각주:15]의 방식으로, 망상을 통해 상상불가의 영역에 이를 수 있는데, 물론 이때에도 그러한 경지란 하등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해도 좋을 게, 모름지기 생각이란 그에 근접하기가 무섭게 그것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연기가 빚어낸 손이 그의 팔을 붙들고서 내리막길인지 아닌지 모를 내리막길로 이끌고, 중심인지 아닌지 모를 중심을 보여준 다음, 보드카로 인해 천천히 수정과 거품이 끓어오르는 위장에다가, 언젠가, 한 없이 아름답고 절망적인 또 다른 망상에 의해, 불멸이라 불렸을 무언가를 가져다 둔다. 올리베이라는 비로소 두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이르길, 어떤 초라한 의식이 있어 더욱 명확히 중심을 보여주기 위해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럼에도 상상불가한 중심을 향해 자신을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러면 모두 다 잃은 건 아닐지도, 또 언젠가 다른 상황 하에서라면, 다른 시련들을 치룬 다음이라면, 그 경지로의 도달도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정확히 어디로의, 무엇을 위한 도달이란 말인가? 그는 너무도 취한 나머지 작업을 위한 최소한의 가설을 세우기도, 가능한 경로를 고안해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취했다 하더라도 연이은 생각을 멈춰야 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그 보잘 것 없는 생각만으로도 자신이 매번 무언가 까마득히 먼 것으로부터 멀어짐을, 딱 보드카 안개며 마가 안개나 베시 스미스 안개처럼 얼빠진 안개들을 통해 드러나기에는 너무도 귀중한 무언가로부터 멀어짐을 느끼기엔 충분하였다. 별안간 어지러이 돌고 도는 초록색 환들이 떠올랐고, 그는 두 눈을 뜨고 말았다. 음반들이 다 돌고 난 후, 늘상 그러하듯 욕지기가 끓어오른 것이었다.

 

(-106장)

  1. 카슨 맥컬러스(1917-1967) : 미국 소설가 [본문으로]
  2. 아서 밀러(1915-2005) : 미국 극작가 [본문으로]
  3. 레몽 크노(1903-1976) : 프랑스 작가 [본문으로]
  4. 영국의 기독교 신비주의자 프란시스 톰슨(1859-1907)이 쓴 총 182행으로 이루어진 시다. [본문으로]
  5.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의 영성시 일부로 ‘높이 높이 날아올라 사랑의 포로에 나 다다르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으로]
  6. 콜먼 호킨스(1904-1969) : 미국의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가 [본문으로]
  7.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의 나라로 수도는 사라예보다. [본문으로]
  8. 미국에서 생산되어 다른 국가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아스피린 함유 제산제다. [본문으로]
  9. 디지 길레스피(1917-1993) : 미국의 트럼펫 연주자로 찰리 파커와 함께 밥Bop 시대 전설적 존재. [본문으로]
  10. 마가의 출신지역의 라플라타 강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1. 폴 화이트먼(1890-1967) : 미국의 음악가. [본문으로]
  12.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웃을 위한 기도를 중보(자의) 기도라고 하지만, 신학 용어에서는 중보자와 중재자가 구분된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여, 그 외 다른 메시아들의 경우는 중재자로 분류한다. [본문으로]
  13. 베이클라이트는 20세기 초에 발명된 최초의 인공 플라스틱으로 음반은 물론이고 당구공, 프로펠러, 케이스, 파이프 등 금속이나 목재를 대체하며 플라스틱의 시대를 열었다. [본문으로]
  14. 프랑스어로 cafard는 1차적으로 바퀴벌레를 의미하지만 관용적 표현으로 지겨움이나 권태 등을 뜻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5. 해당 단어를 신학에서는 중재기도 또는 중보기도의 의미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vasistas
,

2020.07.12

떠들기 2020. 7. 12. 12:14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었다. 어제는 자기 전까지 <<팔방치기>> 12장 번역을 했다. 오늘 쯤이면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자베스도 코르타사르도 번역들을 언제 끝낼지는 몸 상태 때문에 자신이 없다. 여하간 밥을 먹고서 레몽-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를 읽었다. 김화영 번역인데, 소설은 그냥 조금 읽다가 멈추었고 뒤에 레몽-장과의 대담이 실려 읽어보니, 김화영이 유학을 갔을 당시 대학의 선생이기도 했고, 김치수의 지도교수였던 사람인 걸 알 수 있었다. 당대에도 이미 30년 전의 운동이었더 누보로망과 그 이후의 문단의 흐름, 시의 몰락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모든 것도 이미 옜날인 것이, 그럼에도 내게는 그리 멀지 않은 것이, 이제 와서는 유투브의 알고리즘이 모든 연대기적 질서를 부수고 비연대기적인 현존들을 보여주지만 기실 독서란 오랜 시간 연대기 속에서 마냥 비연대기적일 수 있는 행위인 것이, 다시금 느껴졌다.

Posted by vasistas
,